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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서(盧 恕)

노 단(盧 亶)

노준경(盧俊卿)

노상인(盧尙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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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숭(盧 嵩)

생 애

선생의 품성

업 적

 

현대인물


▣ 노 숭(盧 嵩)

 

1. 생애(生涯)

선생의 자는 중보(中甫), 호(號)는 상촌(桑村), 시호(諡號)는 경평(敬平), 본관(本貫)은 광산(光山)이며 아버지 준경(俊卿) 어머니 임피군(臨陂郡) 부인 사이에서 1337년 4월에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이 포은 정몽주 선생의 사사를 받았다. 공민왕 때 문과급제(1365년)하여 사환(仕宦)에 나아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으면서 슬기와 결단으로 충군애민의 상을 몸소 실천한 사실이 양촌 권근이 지은 기문과 호정 하륜이 지은 비문에 열거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노씨로서는 처음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사후(死後)에는 태종이 3일간 조회를 폐했으며 경평(敬:夙夜警戒, 平:執事有制)의 시호를 받아 후에 사림의 추앙으로 원사(玉淵祠)에 봉향되는 덕(德)을 끼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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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려말기(高麗末期)

고려의 지평으로 충절을 지키려던 준경(俊卿:嵩의 아버지)은 충혜왕이 원나라 사신들의 속임수에 말려들어서 왕이 체포되어 곤경에 처한 것을 돕다가 애석하게 원나라 사신들에게 분사(憤死)당하였다. 고려 말기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여 왕을 폐하고 세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때 지평공(持平公)이 돌아가시고 문중도 피해를 입게 되자 상촌 선생은 어린 몸으로 임피군부인(臨陂郡夫人)과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피난하여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선생은 21세 되던 해인 1357년(高麗 恭愍王 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9세 되던 1365년(恭愍王 14)에는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판예문검열(判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이후로 청요직(淸要職:중요한 직분을 갖는 지위)을 두루 역임하였다. 33세 되던 해인 1369년(恭愍王 18)에 선덕랑 사헌규정(宣德郞 司憲糾正)에, 36세 되던 1372년(恭愍王 21)에는 승봉랑 우정언 지제교(承奉郞 右正言 知製教)에, 1375년(高麗 禑王 1)에는 통직랑 사헌부지평(通直郎 司憲府持平)에 임명되어 자금어대(紫金魚帶)를 받았다.

 

40세 되던 해인 1376년(禑王 2)의 봄에 강원도 안렴부사(江原道 按廉副使)가 되었고, 9월에는 봉선대부 진현관 직제학(奉善大夫 進賢館 直提學)에 임명되었다. 45세 되던 해인 1381년(禑王 7)에 봉익대부 예문관제학 지춘추관사상호군(奉翊大夫 藝文館提學 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자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것이 오로지 타당(妥當)하였고 임금께 충성스럽게 간(諫)하였으므로 47세가 되던 1383년(禑王 9)에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에 녹훈(錄動)되었다.

 

선생의 나이 52세 되던 해인 1389년(高麗 恭讓王 1) 12월에는 봉익대부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겸 감창안집전수권농관학자제조 형옥병마공사(奉翊大夫 全羅道 都觀察黜陟使 兼 監倉按集轉輸勸農管學士提調 刑獄兵馬公事)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전라지방의 세곡(稅穀)을 위한 조창(漕倉)이 선생의 발안(發案)으로 설치되었다.

 

나. 조선초기(朝鮮初期)

고려의 국세가 점차 기울어져 가고 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信望)이 땅에 떨어지게 되자 결국 고려(高麗)는 망하고 이어서 조선왕조(朝鮮王朝)가 개국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격동기에 선생은 매우 신중하고 대범한 태도를 보였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의 특별한 지우(知遇:남이 나의 學識과 人品을 알아 후하게 대접함)를 받아 방우정승(榜友政丞)인 하륜(河崙) 등의 간곡한 청(請)으로 조선(朝鮮)의 개국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태조는 선생의 충직함과 재능을 높이 인정하여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대우하고 원주(原州)에 있는 30결(結:약 5만평)의 밭(田)을 하사(下賜)하였으며, 음직(蔭職: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의 자손들에게 과거를 치르지 않고 주는 벼슬)을 내려 선생의 공(功)이 후세에까지 미치게 하였다.선생의 나이 56세 때인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고 그 해 7월에 선생은 가정대부 동지중추원사(嘉靖大夫 同知中樞院使 都評議司事)와 집현전학사 겸 호조전서(集賢殿學士 兼 戶曹典書)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진헌사(進獻使)에 임명되어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으로 명(明)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의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경기좌도관찰사(京幾左道觀察使)에 임명되자 경기도 내에 있는 높은 벼슬아치들의 많은 농토에 과역(課役)을 공평하게 하고자 태조께 건의하였으나 권신(權臣:권력을 잡은 신하)들의 방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생은 64세 되던 해인 1,400년(太祖 元年)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삼사좌사 지의정부사(三司左使 知議政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임피군부인(臨陂郡夫人) 李氏가 93세의 노령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상장(喪葬)의 예(禮)를 다하였다.

그 다음 해인 1401년(太宗 1)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감)되자 효성이 지극하였던 선생은 전(箋)을 올려 상제(喪制)를 모두 마치도록 간청하였으나 선생의 재능과 학식을 아까워했던 太宗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1404년(太宗 4)에는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천전(遷轉:벼슬자리를 옮김)되어 7년간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75세 되던 해인 1401(太宗 11)에는 의정부 검교 우의정(議政府 檢校 右議政)에 임명되어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되자,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등 나이가 비슷하고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과 함께 기영회(耆英會:정2품 이상의 관직을 가진 70세 이상의 元老들이 모여 만든 모임)를 조직하여 여생을 한가롭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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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平公 桑村先生의 墓

所在:서울시 구로구 천왕동

 

 

1414년(太宗 14) 음력 8월 4일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선생이 돌아가시자 태종은 3일 동안 정사(政事)를 폐(廢)하고 조의(弔意)를 표하였으며, 많은 부의(賻儀)를 하사하여 치제(致祭:功臣에게 내리는 제사)하고, 유사(有司)에 명(命)을 내려 그 해 10월에 부평부(富平府)에서 동(東)쪽으로 30리(里)쯤 떨어진 수탄면 천반리 경좌원(水呑面 天班里 庚坐原: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에 예장(禮葬)하게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경평(敬平)」으로 내렸다(敬平은 ‘夙夜警戒曰敬, 執事有制曰平’에서 연유하였다).

경평이란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에서 상촌선생(桑村先生) 한 분 뿐이다.

선생의 묘소(墓所)는 현재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에 위치해 있고, 제향(祭享)은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의 옥연사(玉淵祠)에서 지내고 있다.

 

다. 家族과 後孫

선생의 초취(初娶:첫 번 혼인으로 맞아들인 아내) 낙성군부인(洛城郡夫人) 김씨(金氏)는 찬화공신(贊化功臣)이었던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딸로 선생과의 사이에서 5형제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의미를 갖게 하여 장남(長男)은 휘(諱)가 상인(尙仁)으로 양근군사(楊根郡事)이었고, 차남(次男)인 휘(諱) 상의(尙義)는공조참의(工曹參議), 3남(三男)인 휘(諱) 상례(尙禮)는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4남(四男)인 휘(諱) 상지(尙智)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5남(五男)인 휘(諱) 상신(尙信)은 광주목판관(廣州牧判官)이었다.

 

5형제의 이름은 「상(尙)」자 항렬(行列)에 유도(儒道)의 5상(五常)인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붙인 것으로, 후손(後孫)들은 일룡방(一龍房)ㆍ이룡방(二龍房)ㆍ삼룡방(三龍房)ㆍ사룡방(四龍房)ㆍ오룡방(五龍房)으로 불러오고 있다.

본관(本貫)이 광주(光州)인 「서(恕)」자 계파(系派)는 모두 상촌(桑村)선생의 후손들이다.

낙성군부인 김씨의 묘소는 풍덕군 중련역 외산(豊德郡 中連驛 猥山)에 북동향(北東向)으로 위치해 있었다 하나 실전(失傳)되어 1980년 위판(位版:위패)으로 경평공 산소에 합폄하였다. 후취(後娶:후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김씨(金氏)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상낙군(上洛君) 김후(金厚)의 딸로서 선생과의 사이에 일녀(一女)를 낳아 대사성(大司成) 동래 정씨(東萊 鄭氏) 곤(坤)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영가군부인 김씨의 묘소도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廣州郡 九川面 古德里)에서 1980년에 지금의 경평공 묘(墓)에 합폄(合窆)하였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마르고 바다에까지 흘러가며,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모진 비바람에도 아니 쓰러지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듯 상촌(桑村) 선생이 돌아간 후에도 현신(賢臣), 대유(大儒), 도의(道義)와 절의(節義)로 이름이 높은 후손들이 줄을 이어 탄생하였다.

 

◎ 옥연사(玉淵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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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연사는 경평공 상촌선생의 영정(影幀)이 1658년에 봉안되고 춘추로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다가 후에 경상도 유림에 의해 예조의 승인을 받아 1787년에 후손(14대)인 지음(芝陰:盧啓元)공을 배향하여 춘추로 향사를 하며 후학을 교육하던 곳이다.

그간에 서원훼철로 위패를 묻고 향사를 중지했는데 1990년경 문화재로 지정되고 또 92년경 국가예산을 들여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삼간)과 내문 강당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경평공 영정은 1568년 소재선생이 중추공(中樞公:德基 세조와 동서간임)의 둘째아들 금산공(熙淑)의 후손 여용(如龍)의 집에서 경제(서울)에 모시고 이때 13인이 참배했던 소재선생 시가 남아있다. 후에 봉화공(景命)이 고향인 현 위치에 봉안했다. 현재 옥연사에는 상촌선생의 영정이 봉안되고 또 소재선생의 영정과 기영회도 송조오현 영정을 함께 모셨으나 현재 향사(享祀)를 못하고 있다.

 

상향축문(常享祝文)

純謙厚德端直勁操 績成鼎軸明德是報

(순겸후덕단직경조 적성정축명덕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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