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 래

1. 노후.노홍 신도비(盧珝.盧鴻 神道碑)

 

흐르는 물은 반드시 그 원천(源泉)이 있고 나무는 그 뿌리가 있으므로 해서 자란다(水有源樹有根). 사람도 뿌리가 있으니 그 뿌리는 곧 시조(始祖)이다.

그로부터 자손(子孫)이 생기고 그 자손의 몸에는 선조의 피(血統)가 흐르고 있으며 같은 피는 같은 성(姓)이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성을 갖게 된다.(因生以爲姓). 또한 [춘추전(春秋傳)]에 따르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천자(天子)가 성을 내린다.(天子因生以賜姓).”라 하였고 [시전(詩傳)]에도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한 할아버지의 자손(同祖同孫)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의 성(姓)은 예부터 임금이 어떤 백성(百姓)에게 특별히 내리거나 그들의 선조(先祖)나 시조(始祖)가 오랫동안 살았던 고장의 이름을 따서 성(姓)을 정(定)하기도 하였다.

 

원래(原來) 우리 성씨(姓氏)가 발원(發源)한 곳은 중국 서부 황토고원 섬서성 보계시 무공현 강수지역(中國 西部 黃土高原 陝西省 寶鷄市 武功縣 姜水地域)이며 처음 강성(姜姓)에서 시작(始作)하여 강(姜), 여(呂), 고(高)씨에서 노씨(盧氏)로 득성(得姓)하게 되었다.

강성(姜姓)으로 창성(創姓)하게 된 것은 휘(諱) 강석년(姜石年), 호(號) 염제(炎帝), 신호(身號) 신농(神農) 벼슬이 황제(皇帝)이신 창성시조(創姓始祖)께서 화산(華山) 신용동(神龍洞)에서 태어났고 강수(姜水)에서 성장(成長)하였기 때문에 그 지명(地名)을 따서 복희황제(伏羲皇帝)께서 사성(賜姓)을 강성(姜姓)으로 내려 창성(創姓)되었다.

복희황제(伏羲皇帝)와 창성시조(創姓始祖) 신농(神農)은 중국(中國) 상고대 역사(上古代 歷史)속의 큰 인물로 뿌리설명과 연관되기 때문에 중국통사(中國通史)를 인용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고대사의 전설시대(傳說時代)는 적어도 황제(黃帝)에서 하왕조(夏王朝)의 걸(桀)에 이르기까지의 1천년의 시대를 포함하고 있다. 제일 먼저 황제(黃帝)를 중국역사의 기점(起點)으로 설정한 사가(史家)는 한무제(漢武帝) 때의 사마천(司馬遷)이었다.

그는 사기(史記) 가운데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황제(黃帝)를 중국고대의 처음 군주(君主)로 내세우고 있다.삼황(三皇)에 대한 말은 진시황(秦始皇) 때에 이미 있었다. 당시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즉 진황(秦皇)을 가리켰다.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저서(著書) 가운데 나타나는 삼황(三皇)은 복희(伏羲), 신농(神農), 여와(女媧), 유과(有巢), 수인(燧人) 등 가운데서 임의로 셋을 택하여 삼황(三皇)이라 불렀으므로 결과적으로 여러 종류의 설(說)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는 사적(事蹟)이 있다.

 

그것은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발명하고 신농씨(神農氏)가 백성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수인씨(燧人氏)가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黃帝)는 대개 BC 2700년에서 BC 2600년 사이의 사람으로서 신농씨(神農氏)의 후예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황제(黃帝)는 모든 고대제왕(古代帝王)의 시조(始祖)로서 즉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우(禹), 은(殷)의 시조인 계(契), 주(周)의 시조인 기(棄)와 같은 이도 모두 그의 후손으로 되었으며 자연히 이들 제왕(帝王)의 후대(後代)도 포함되고 있다. 오제(五帝)라는 말은 춘추시대(春秋時代)에서 유행된 것 같다. 즉 공자(孔子)의 제자인 재아(宰我)가 공자에게 오제(五帝)의 덕(德)에 대해서 물은 일이 있었다는데 재아(宰我)가 말하였던 오제(五帝)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전한(前漢)에 이르러 오제(五帝)에 대한 내용이 명확하여졌는데 그것은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으로 되어 있다.

 

신농황제(神農皇帝:約 5300餘年 前)는 우리의 창성시조(創姓始祖)이고 신농황제의 16세손(世孫) 백이조(伯夷祖:約 4200 餘年 前)는 씨시조(氏始祖)이다.(性은 母系血統, 氏는 父系血統) 백이조(伯夷祖)가 사악(四岳:四方의 大部落)의 수령(首領)으로 있을 때 우(禹)가 순(舜)황제의 명신(名臣)으로서 황하(黃河)의 대범람과 홍수(洪水)를 예방하고 다스리는 치수(治水)에 13년(일설에는 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모든 힘을 다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역사(役事)를 위하여 백이조(伯夷祖)가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큰 도움이 되는 공(功)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우(禹)는 순(舜)황제의 인정을 받고 섭정(攝政)의 명을 받았다. 그리고 순황제가 별세한 후 그 뒤를 이어 황제를 계위(繼位)하였다.백이조(伯夷祖)는 그 공(功)으로 여읍(呂邑:現 河南省 南陽市)의 땅을 받고 여국왕(呂國王)으로 봉(封)해지는 한편 여(呂) 땅의 지명(地名)을 따서 여씨(呂氏)로 사씨(賜氏)되고 강성(姜姓)을 다시 강씨(姜氏)로 내려졌다.

이때부터 여씨, 강씨의 두 씨(氏)를 사용했으며 백이조(伯夷祖)가 씨시조(氏始祖)가 되었다.백이씨시조(伯夷氏始祖)의 35세손(世孫)인 여상=강태공(呂尙=姜太公)은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스승 즉(卽) 태사(太師)이다.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멸(滅)하고 주(周)나라를 세우니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이다. 그 공으로 제(齊)나라 왕에 봉(封)해졌다(約 3200 餘年 前). 제(齊)나라(現 山東省) 수도는 영구(營丘:現 山東省 淄博市 臨淄)이다.

 

공(公)의 자손수(子孫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70여개 이상의 성씨(姓氏)가 분파(分派)되었다고 한다. 보통 태공(太公)이나 태공망(太公望)으로 부를 때는 강씨(姜氏)를 많이 쓰고 상(尙)이란 이름을 쓸 때는 여씨(呂氏)를 많이 사용(使用)한다. 강태공 성조(姜太公 聖祖)의 8세손(世孫) 문공(文公) 적(赤)의 차자(次子) 고원(高元)은 제(齊)나라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바가 있어 고읍(高邑:現 河南省 禹州市)에 봉(封)해지고 지명(地名)을 씨(氏)로 삼아 득성(得姓)하니 고씨(高氏)가 탄생(誕生)되었다.

 

문공(文公)의 아들 고원(高元)의 손자 고혜(高傒)가 제국(齊國)의 세습총리(世襲總理)이고 유명(有名)한 제환공(齊桓公)과는 재종 숙질간(再從 叔姪間)이며 양공(襄公:桓公의 兄)이 정변(政變)으로 살해(殺害)되는 반란(反亂)을 평정(平定)하고, 제환공(齊桓公)을 제(齊)나라 왕(王)으로 옹립(擁立)한 분이 재종숙(再從叔) 고혜(高傒)이다.

그 공(功)으로 노현(盧縣:現 山東省 濟南市 長淸區)의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고 왕(王)으로 봉(封)해졌으며, 지명(地名)을 따서 씨(氏)로 삼아 노씨(盧氏)가 탄생(誕生)하게 되었다. 고혜(高傒)와 노혜(盧傒)는 같은 사람이며 노혜(盧傒)는 전세계(全世界) 노씨(盧氏)의 득씨(得氏) 시조(始祖)가 되었다.(約 2700 餘年 前)

 

姜太公 ~ 盧傒 世系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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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세계도(世系圖)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득씨시조(得氏始祖) 노혜(盧傒)는 강태공망(姜太公望)의 11세손(世孫)이다. 중국의 [사기(史記)], [성찬(姓纂)], [통지씨족약(通志氏族略)], [색은(索隱)], [화하여성사천년(華夏呂姓四千年)] 등 옛 전적(典籍)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강태공망(姜太公望) 여상(呂尙)의 자(字)는 자아(子牙), 호(號)는 비웅(飛熊), 휘(諱)는 상(尙)이다. 통칭(通稱) 강태공망(姜太公望) 여상(呂尙)이라 쓴다.

 

BC 1211년(商康 丁8年) 8월 3일에 탄생(誕出生)하여 BC 1072년(周康王 6年) 향수(享壽) 139세로 졸(卒)하였다. [가세(家世)]에는 “강태공(姜太公)은 염제 신농씨의 후손으로 주(周)나라 강소(江蘇)의 동쪽 해안지방 사람이며 그의 성(姓)은 강씨(姜氏)이고 이름은 아(牙)인데 그를 존칭하여 자아(子牙)라고 불렀다.

(家世:神農氏之裔. 江蘇東海人. 姓姜名牙 稱子牙)”로 되어있고 [사기(史記)]에는 동쪽 해안지방의 사람이라고 하였으므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제주(齊州) 출신일 것이며 또 당나라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주(註)하여 낸 [색은(索隱)]이라는 책에도 태공이 염제(炎帝)의 자손이라고 되어 있다.

 

다른 전적(典籍)에는 “중국 정동쪽 산동성 일조시(日照市)에서 출생하였다.”고 되어 있다. 강태공(姜太公)의 내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여러 가지 설은 결코 태공이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스승이 되어 천하(天下)를 통일한 것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틀림없다.강태공(姜太公)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첫 만남은 은(殷)나라의 주(紂)가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라 갖은 폭정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이 주(紂)는 결국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의하여 타도되었는데 이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文王)이 하루는 사냥을 가려다가 귀갑(龜甲)으로 점(占)을 쳐보니 이번 사냥에는 짐승 대신 훌륭한 인재를 얻을 것이라고 점괘가 나왔다.

“그 인재는 장차 임금에 버금가는 위치에 오르거나 제후가 될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늘에서 폐하께 스승을 보내시어 국사를 보좌토록 하신 것이니 이 나라를 3대에 걸쳐 돕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그때 사관인 편(編)이라는 자가 문왕에게 다가와서 말을 했다.

 

그리하여 위수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간 문왕(文王)은 마침 그 곳에서 연일과 다름없이 낚시질을 하고 있는 노인(呂尙:71세)을 만난다.문왕은 첫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문왕은 강태공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붙였다. “낚시를 즐겨하시는가 봅니다.” 이것이 태공과 문왕과의 문답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자 강태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을 할 때 군자(君子)는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즐기지만 소인배는 일의 결과에 어떤 이익이 생기는 것만을 좋아합니다. 제가 지금 낚시를 하고 있는 것도 그와 비슷한데 저는 지금 고기를 낚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 문왕이 다시 물었다. “지금 낚시질을 하고 있는 것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말해주시겠소.” 여상이 다시 대답했다. “낚시에는 세 가지의 심오한 이치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미끼로서 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祿)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먹이라야 더욱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는 법인데 인재에게 녹을 많이 주면 줄수록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고기는 크기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이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여상(呂尙)은 낚시질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일 같지만 이처럼 심오한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낚시하는 자체로 천하(天下)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의 뜻이 깊으면 물고기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고 더욱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문왕은 그 말에 감탄하여 다시 물었다.

 

“그 낚시 비법에 숨은 이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여상(呂尙)이 대답했다. “샘이 근원이 깊을수록 물은 쉼 없이 흐르는 법이고 물이 쉼 없이 흘러내리는 곳에는 항상 물고기가 사는 법입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튼튼하게 자라고 튼튼한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리는 법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지만 군주와 신하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군주와 신하가 서로 뜻이 같으면 서로 존중하며 깊은 정으로서 일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와 천하의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올바른 이치입니다.” 여상의 말이 끝나자 문왕(文王)은 일어나 그에게 경의의 뜻으로 두 번 절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그 말은 하늘의 이치라 할 수 있군요.

 

그대는 하늘에서 내게 내려준 분이니 어찌 하늘의 명을 거역하겠소이까.”이상의 경우와 같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은 급소를 찌르는 물음에 급소를 말하는 현문현답(賢問賢答)이었다. 문왕은 기뻤다.

그는 “우리 조상 태공(太公:문왕의 아버지 기(棄)를 가리킴) 때부터 성인이 주(周)를 찾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주나라는 크게 일어난다고 하는 예언(豫言)이 있었소. 바로 당신이 그 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참으로 당신을 대망(大望)하여 그렇듯 기다렸는데 지금 태공(太公)이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고 말했다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왕은 강태공을 수레에 태워 궁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강태공은 문왕의 스승이 되었고 BC 1135년(강태공 76세)에 문왕의 태사(太師)와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現 國務總理)를 겸임케 하였다.

 

강태공은 좋은 정책을 아뢰어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3분의 2까지 잠식해 들어갔으며 은의 제후(諸侯)들이 주나라를 따르게 하고 풍읍(酆邑)에 도읍을 건설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지세를 차지케 하였다. 그러나 문왕은 그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전쟁 중에 죽고 아들 희발(姬發)이 왕위를 계승(繼承)하여 무왕(武王)에 올랐으며 강태공(姜太公)을 상부(尙父)와 태사(太師)로 모시었다. 이 무렵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육도삼략(六韜三略)]이란 책이 있다.

 

육도(六韜)는 주(周)나라의 강태공망(姜太公望)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강태공과 문왕, 무왕의 일문일답(一問一答)을 엮은 것이라고도 하며 병서(兵書)이면서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부터 인간학, 조직학에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人倫)을 논(論)한 것이 특색이다. 이 책은 중국의 모든 병법의 시초라고도 한다.

육도(六韜)라 이름 한 것은 그 속에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의 여섯 권이 있기 때문이다.삼략(三略)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黃石公)이라는 은군자(隱君子:명예를 구하지 않는 군자)가 이고(圮稿)라는 곳에서 장량(張良)에게 전해준 태공망(太公望)의 병서라 전해온다. 이 책을 삼략이라고 한 것은 이 책 중에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의 세권의 책이 있으므로 이름 하게 된 것이다.

또 략(略)은 책략(策略), 모략(謀略)의 뜻이다. 주(周) 무왕(武王)은 즉위한 9년에 은(殷)나라를 칠 사전 공작으로서의 맹진회맹(孟津會盟:黃河邊上의 孟津)을 통하여 시위를 하여 제후(諸侯) 중의 얼마만한 숫자가 실제로 무왕과 뭉치겠다는 가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周) 무왕(武王) 3년(강태공 89세)에 강태공을 주축으로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 융거(戎車) 300대와 800 제후(諸侯)들의 지원 하에 목야(牧野:河南省 汲縣 朝歌鎭)에서 주신군(紂辛軍) 70만을 궤멸시키고 조가(朝歌:殷首都 지금 河北省 淇縣)를 함락하니 폭군 주신(紂辛)은 등록대(登鹿臺)로 달아나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죽고 은왕조(殷王朝)는 멸망하였다.대승을 거둔 무왕은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하늘에 보고하는 제사를 드리었다.

 

그리고는 백성의 피를 빨아 긁어모았던 은나라의 보화와 곡식을 모조리 내어다가 백성에게 내림으로써 다시 한 번 백성의 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候),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의 작위(爵位)로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여 제후(諸侯)로 봉(封)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封建制度)를 실시하였다.

 

그때 공(公)ㆍ후(候)는 사방 100리(百里), 백(伯)은 사방 70리(70里), 자(子)ㆍ남(男)은 사방 50리(50里)의 땅을 받았다고 한다. 강태공(89세)도 BC 1122년 천하통일(天下統一) 및 주천자국(周天子國)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제(齊) 땅 사방 100리를 받고 제왕(齊王)으로 수봉(首封)되었다. 도읍지(都邑地)는 영구(營丘:지금의 山東省 淄博市 臨淄區)로 정(定)했다. 그 후 태공은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며 예법(禮法)을 간소화 하는 등 백성들을 위하여 올바른 정치를 펴 나가고 어업 외에 제염업 등 상공업을 진작하고 수산을 장려함으로써 상공업의 발달로 제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무왕의 다음인 성왕(成王) 때에 무왕(武王)의 제(弟)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반란이 있었다. 성왕은 사자를 보내어 태공에게 동쪽은 해안선까지 서쪽은 황하, 남쪽은 삼릉(幓陵), 북쪽은 무체(無棣)에 이르기까지의 그 안에 있는 제후를 임의로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로써 태공은 천자에 속하는 선전(宣戰) 강화의 대권의 3분의 1을 위임받은 것이다. 그 후 봉토가 점점 확대되어 처음 받았던 100里가 5千里가 되어 그 후손인 환공(桓公)이 뒷날 밝은 정치를 펴 제후(諸侯)들을 통수(統帥)하게 되기까지의 길을 트게 한 것이다.강태공이 지휘한 목야(牧野) 상(商)나라를 멸하는 저명한 대전(大戰)과 강태공의 병법(兵法) 모두 중국에서 제일 빠른 사례이고 병서(兵書)이다.

이것 때문에 강태공은 중국의 군사시조(軍事兵祖)로 칭할 수 있다. 당(唐), 송(宋) 전에는 강태공을 역대 황제들이 무성(武聖)으로 봉하였고 당 숙종(唐 肅宗)은 강태공을 무성왕(武聖王)으로 봉하였으며 송(宋) 진종 때는 강태공을 조열무성왕(照烈武成王)으로 봉하였다.

 

원조(元朝) 시대부터 민간에서는 강태공을 신화전설로 발전하였고 명대만력(明代萬曆) 연간에서 허중림(許仲琳)이 봉신연의(封神演義) 소설을 창조해서부터 강태공은 사람으로부터 신선 인물로 변했으며 민간에서 강태공을 신봉(信奉)하기 시작했다.

 

강씨(姜氏)의 세계(世系)는 신농씨(神農氏)인 염제(炎帝)의 직계(直系) 후손으로서 황제(皇帝)에게로 전하여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하나의 성씨(姓氏)가 확대되었고 또다시 나누어져서 여(呂), 강(姜), 노(盧), 고(高), 허(許), 기(紀), 사(謝), 구(丘), 정(丁), 최(崔), 제(齊), 장(章), 신(申) 등의 13성(姓)이 되었으니 이는 모두 하나의 혈통(血統)이며 다 같은 한 종족(宗族)이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하였고 대만의 경우 여(呂), 강(姜), 노(盧), 고(高), 허(許)의 오성(五姓)만을 한 종족으로 삼고 예를 들어 금문(金門)에서는 매년 동지 때마다 이상의 오성(五姓)이 모여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편으로 열산오성종친연합(烈山五姓宗親聯合)이 있다. 여기에 오성(五姓)은 여(呂), 노(盧), 고(高), 허(許), 기(紀)씨이며 나라를 보면 중국, 홍콩, 대북,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한국, 일본, 미국 등이며 같은 혈통 및 종족으로 매년 국가별로 순회하면서 열산오성종친연합간친대회(烈山五姓宗親聯合懇親大會)를 큰 행사로 열고 있다.

 

강태공망(姜太公望)의 묘(墓)는 섬서성 함양시 주능향 문왕릉(陝西省 咸陽市 周能鄕 文王陵) 우(右)편에 있고 의관총(衣冠冢)은 고향(故鄕) 영구(營丘:山東省 淄博市 臨淄區 永流鄕)에 있으며 사당(詞堂)도 같은 곳에 있다.

노씨(盧氏)의 근원(根源)에 대해서는 앞서 노혜(盧傒) 외에도 몇 가지 다른 설이 있다. [통지씨족약사(通志氏族略史)]에 의하면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후손으로 노포(盧蒲)씨라는 복성(復姓)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후에 성을 노(盧)씨로 바꾸고 범양(范陽:지금 涿州)지방에 살았다고 한다.

또 위서관씨지설(魏書官氏志說)에 보면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새로운 노씨들이 여럿 생겨났는데 이들 중 하나가 원래는 막노(莫蘆)씨였으며 후에 초두머리(艸)를 없애고 노씨로 고쳤다고 한다. 또 토복노(吐伏盧)씨가 있는데 이들도 그냥 노씨로 고쳐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노씨들은 노혜가 득성(得姓)을 한 후에 생겨난 것들이다. 중국 노씨들은 대부분 지금의 산동성 장청구(山東省 長淸區)의 서남쪽과 하북성 탁주시(河北省 涿州市) 일대, 그리고 남하하여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 등지에서 이 지방의 대성(大姓)으로 번창(繁昌)하였다. 제(齊)나라 강공대(康公代:20世)에 이르러 왕업(王業)을 부하(部下)인 전화(田和)라는 자에게 빼앗기자 노씨들은 연(燕)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한다.

 

2. 발현(發顯)

 

노씨득씨조(盧氏得氏祖) 노혜(盧傒)는 원래(原來)는 고씨(高氏)였는데 노읍(盧邑)에 식채(食采)됨으로써 노혜(盧傒)가 되었다. 노혜는 염제 신농황제(炎帝 神農皇帝)의 61세손(世孫)이고 백이씨시조(伯夷氏始祖) 여왕(呂王)의 48세손(世孫)이며 강태공 제왕(齊王)의 11세손(世孫)이다. 8세 문공(文公) 여적왕(呂赤王)의 증손(會孫)이고 문공(文公)의 차자(次子) 9세 고원(高元)의 손자(孫子)이며 10세 고성(高城)의 아들이다.

 

휘(諱) 혜(傒)의 자(字)는 경중(敬仲), 호(號)는 조망(祖望)이다. BC 742년 중국(中國)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주 평왕(周 平王) 제국(齊國) 희공년대(僖公年代)에 중국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 경중진 백토구(中國 山東省 淄博市 臨淄區 敬仲鎭 白兎丘)에서 태어나 수(壽)를 94세를 일기로 졸(卒)하였다.

노혜(盧傒)는 고혜(高傒)와 같은 사람이며 성품이 관후인덕(寬厚仁德)하고 청정정직(淸淨正直)하며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인물이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는 인물이다. 충(忠)과 덕치(德治)를 하는 어진 재상(宰相:上卿)이다. 제(齊)나라 관계(官界) 관료(官僚) 백성(百姓)들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다.

 

고혜(高傒)는 왕손(王孫)이며 그의 선조(先祖) 강태공부터 증조부 문공(文公) 여적(呂赤) 8세까지는 왕(王)이고 조부(祖父) 공자(公子) 고원(高元)은 차남이어서 상경(上卿:총리)이고 아버지 성(城)도 상경이며 본인도 상경이다. 상경(上卿)은 주로 왕이 임명(任命)하고 있으며 특별히 두 명만 천자(天子)가 전(全) 제후(諸侯) 나라 중에서 선택, 임명한다. 고혜는 천자가 임명한 상경이다. 8세 문공(文公)의 장자(長子) 탈 성공(脫 成公)은 왕으로 계속 600년간 장자(長子)로 이어졌고 문공(文公)의 차자(次子) 고원(高元)은 고씨(高氏)를 받고 세습상경(世襲上卿)으로 고씨가 200년 동안 상경(上卿)을 했다.

 

주(周) 장왕(莊王) 11년(BC 686년) 제(齊) 양공(襄公)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니 백성들의 원성이 크고 관료들이 반심(反心)을 품어 이신살군(以臣殺君)하는 일이 일어났다. 양공의 사촌 여무지(呂無知:僖王姪)와 대부연칭(大夫連稱) 관지부(管至父) 등이 반란을 주도하여 양왕(襄王)을 사냥터로 유인하여 죽이고 여무지(呂無知)가 스스로 왕이 되고 연칭 관지부는 정권을 장악하였다.

고혜는 순리에 맞지 않고 비도덕적인 행위에 한탄하여 반적 진압계획을 수립 실천함으로써 반역의 난을 평정(平定)하고 강소백(姜小白:僖王의 一子 襄王, 二子 糾, 三子 小白)을 즉시 왕위(王位 BC 685년)에 올렸다.

이분이 제환공(齊桓公:姜太公 12세손이고 제나라 15번째 王)이며 제(齊) 700년 중 강태공 다음으로 능력 있고 나라를 발전시킨 강한 군주(君主)로 존경을 받았다.

 

제환공(齊桓公)은 고혜(高傒)가 상경(上卿)으로서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만들고 발전시킨 공로(功勞)와 자기를 제왕(齊王)으로 등극시킨 고마움에 노국(盧國)을 고혜에게 식읍(食邑)으로 주고 노씨(盧氏)를 하사(下賜)하니 고씨(高氏) 고혜(高傒)가 노씨를 받고 노국왕(盧國王)이 되어 노혜(盧傒)가 되고 노씨득씨조(盧氏得氏祖)가 된다.

도읍지(都邑地)는 귀덕진(歸德津:現 山東省 濟南市 長淸區)이다. 노혜득씨조(盧傒得氏祖) 노왕(盧王)은 94세로 세상을 떠나고 장자(長子) 고호(高虎) 제(齊)나라 상경(上卿:總理)은 고씨(高氏)를 이었고 차자(次子) 산(山)은 노씨(盧氏)를 이어 노국(盧國)에서 400여 년간 노씨의 왕업(王業)을 이었다.

 

묘(墓)는 중국 산동성 제남시 장청구 귀덕진 분태촌(中國 山東省 濟南市 長淸區 歸德津 墳台村)에 있고 노왕묘(盧王墓) 위에 노왕묘비(盧王墓碑)가 서 있다. 의관총(衣冠冢)은 고향(故鄕) 산동성 치박시 임치구 경중진 백토구(山東省 淄博市 臨淄區 敬仲鎭 白兎丘)에 있으며 묘고(墓高) 7M, 남북(南北)길이 39M 동산 크기로 모셔져 있고 묘지 표시비는 고혜(高傒)로 되어 있다.

1970년 의관총(衣冠冢)에서 출토(出土)된 유물(遺物) 고자과(高子戈) 칼이 나와서 재도역사박물관(齊都歷史博物館)에 보존(保存)하고 있다. 오랫동안 수많은 나라들로서 갈라져서 서로 싸워오던 중국이 진시황(秦始皇)에 의해서 통일되었고 역사상(歷史上) 노씨(盧氏)로서 가장 일찍 세상에 나타난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노생(盧生)이란 사람이다. 진시황이 그를 초빙하여 해외

 

노씨세계(盧氏世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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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外)에 나가 장생불로약(長生不老藥)을 구해 오라고 명(命)하였다. 이를 구하기 위하여 서복(徐福)과 같이 동남(童男) 500명, 동녀(童女) 500명을 데리고 신선(神仙)들이 산다는 곳으로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신선을 찾은 것에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다만 이름이 이미 [사기(史記)]에 올랐던 자체가 노씨(盧氏)의 이름을 나타낸 것이다. 또 노오(盧敖)라는 분이 나오는데 이분의 자(字)는 옹희(雍熙)이고 노혜(盧傒)의 13세손(世孫)이다.

이 분이 중국에서 노씨들이 많이 산다고 하는 범양(范陽:지금 涿州)의 입향조(入鄕祖)이다. 노오(盧敖)는 주대 말(周代 末) 노국 노읍(盧國 盧邑)에서 제(齊)나라와 노국(盧國)이 전화(田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노(盧), 여(呂), 강(姜), 고(高) 등의 자손들이 일부는 중국 남방으로 이주(移住)하고 타국으로 흩어져 갈 때 많은 노씨들이 연(燕)나라(現 河北省)로 이주(移住)하였다가 범양(范陽)에 입향(入鄕)하게 된 것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노오(盧敖)의 훌륭함을 알고 황제좌전관(皇帝座前官)으로 박사(博士)에 제수하였으며 그 후 진시황(秦始皇)의 명을 받고 신선을 만나기 위하여 북해(北海)로 떠났다가 진시황(秦始皇)의 학정(虐政)을 피하여 하남성(河南省) 노씨현(盧氏縣) 서쪽산 동중(洞中)에 은거하여 살면서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신선이 되어 신선들과 함께 하늘을 올라갔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그가 살고 있던 지방이 유명해져서 노씨현(盧氏縣) 노씨산(盧氏山) 및 노오동(盧敖洞) 등의 지명(地名)이 생겨났고 그를 시조(始祖)로 하여 중국의 노씨들은 범양(范陽)지방에 많이 살게 되었다 한다.

 

진(秦)나라를 이은 한(漢)나라 초기의 노관(盧綰:BC 256年 出生)은 노오(盧敖)의 후손(後孫)이며 강소성 풍현(江蘇省 豊縣)에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해, 같은 날에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으며 같은 서당(書堂)에서 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던 막역(莫逆)하고 친형제와 같은 다정한 친구였다. 한고조(漢高祖)와 함께 군사(軍士)를 일으켜 천하(天下)를 통일하고 한(漢)나라를 건국(建國)하였다.

노관(盧綰)은 한고조를 보좌하는 장군(將軍)이 되어 태위(太尉) 장안후(長安侯) 별장(別將) 등을 거치면서 목숨을 초월(超越)한 도움을 주었다. 그 공(功)으로 연(燕)나라 왕(王)으로 봉(封)해졌다. 나중에 한고조는 정략적으로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한 공신(功臣)들을 제거(除去)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였다.

 

노관은 진희(陣狶)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는 노관이 진희와 내통(內通)하여 반란을 꾸민 것으로 의심을 품게 되었고 노관은 그 해(害)를 피하여 북쪽의 흉노(匈奴)로 가서 동호노왕(東胡盧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서 노관은 세상을 떠났고 그 후손의 일부가 동북쪽인 조선(朝鮮) 부근까지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동한(東漢) 시대에 큰 유학자(儒學者)인 노식(盧植)이란 분이 있는데 자(字)는 자간(子干)이고 노혜(盧傒), 노오(盧敖), 노관(盧綰)의 후손(後孫)이며 140년 동한말(東漢末)에 하북성 범양(河北省 范陽:現 涿州市)에서 태어났다.

머리가 천재(天才)고 음성(音聲)은 종(鐘)소리 같고 키가 8척(尺) 2촌(寸)이고 품행(品行)은 어른 같고 허점이 없었으며 성격이 굳세고 기개(氣槪)가 높고 포부(抱負)가 원대(遠大)하였다.

고금(古今)의 사리(事理)를 넓게 통달하여 벼슬이 북중랑장(北中郞將:軍司令官)과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당시(當時) 동탁(董卓)이 권력을 독차지하고서 조정(朝廷)을 장악하여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시행하니 모두들 “예. 예” 하였으나 노식(盧植)만은 굽히지 않고 하늘을 찌를 듯한 대장부의 기개(氣槪)를 보였으나 동탁(董卓)은 그의 큰 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해칠 엄두를 못 내고 관직(官職)만을 파면시켰다. 나중에 조조(曹操)가 찬양(讚揚)하여 말하기를 “이름은 사해(四海)안에 드러났고 학문은 큰 유학자였네. 선비들의 모범이요 나라의 줄기였네.” 라고 하였다.

 

노식(盧植)은 범양(范陽:現 涿州市)사람으로 유비(劉備)가 세상에 나서기 전에 노식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하였다. 노식은 소년기에 유명한 유학자(儒學者)인 마융(馬融)의 문하(門下)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마융이 미희(美姬)들을 가까이 두고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게 하였으나 노식은 여러 해를 곁에서 공부를 하면서 한 번도 눈길을 돌린 적이 없었으니 그러한 수양은 유하혜(柳下惠)보다 못할 것이 없음으로 마융의 사랑을 흠뻑 받아 있는 대로 다 가르쳐 주게 하여 1천여 년을 두고 독서인(讀書人)에게 존경을 받았다. 노식의 아들은 노육(盧毓)이고 손자는 노흠(盧欽), 증손자는 노지(盧志)ㆍ노호(盧浩)인데 모두 경륜(經綸)을 가득 품고서 조정에 나아가서 이부상서(吏部尙書:현 장관)를 지냈으며 그로부터 노씨의 명망(名望)이 크게 전파되었다.

또한 노식의 후손에 노도세(盧度世)란 분이 있는데 자(字)는 자천(子遷), 벼슬은 청주자사(靑州刺使)이고 국안혜후(國安惠侯)로 봉(封)해지고 사형제(四兄弟)를 두었다.

 

장자(長子)는 노연(盧淵=盧陽鳥), 차자(次子)는 노민(盧敏), 삼자(三子)는 노창(盧昶) 사자(四子)는 노상지(盧尙之)로서 그 명성(名聲)이 중국 전체에 떨쳐 사방노씨(四房盧氏)로 불리웠다.

이외도 수많은 노식의 후손들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중국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노식은 지금의 우리나라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成殿)에 공자(孔子)와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으며 유생(儒生)들이 제사(祭祀)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하북성(河北省) 탁주시(涿州市) 정부(政府)에서는 토지(土地) 5,000평(坪)과 5,000만(萬)원을 들여 노식사당(盧植祠堂)을 건립(建立), 묘(墓)를 이장(移葬)하였고 담장을 쌓고 수로(水路)를 연결하여 위엄 높은 사당 및 묘를 조성건립(造成建立)하였다.

 

2002년 11월 18일 탁주시장 황은교(黃恩橋) 노씨탁주시 종손(宗孫) 노진국(盧振國)과 시정부(市政府) 간부 및 한국, 중국 세계노씨자손(世界盧氏子孫)들의 참석 아래 낙성식(落成式)을 가졌으며 앞으로 기념관(紀念館)과 세계노씨(世界盧氏) 교류장(交流場)을 그 장소에 추가 건설 예정이라고 한다.

 

3. 번성기(繁盛期)

 

당(唐)나라 시대는 노씨(盧氏)가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8명의 노씨(盧氏) 재상(宰相)이 배출(輩出)되었고 그 밖의 수많은 노씨들이 높고 낮은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상의 업적(業績)과 공헌(貢獻)도 끊이지 않아서 명실공이 왕(王), 사(謝), 노(盧), 최(崔)의 1급(級) 귀족(貴族) 네 가문(家門) 중 노씨가문을 수당갑족(隋唐甲族:文閥과 家系가 훌륭한 집안)이라 하였다.

또한 중국(中國)에는 최(崔), 노(盧), 이(李), 정(鄭)씨를 대성(大姓)이라고도 하는데 노씨(盧氏)는 이 사대성씨(四大姓氏)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등 산동(山東), 하북(河北), 하남(河南), 산서(山西) 등 중원(中原)지대에서 큰 명망이 있어 북방지역의 오대세족(五大世族) 중의 하나였는데 이는 역사에 공통된 기록으로써 대대로 문학자(文學者)가 많았으며 황제(皇帝)의 자녀와 연관이 있는 이와 큰 벼슬아치들이 통혼(通婚)하여 친해지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당(唐)나라 초기에 범양지방에 살고 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은 학문적 업적이 높아 당초(當初) 사걸(四傑)의 큰 문호(文豪)였던 왕발(王勃), 양형(楊炯), 낙빈왕(駱賓王) 등과 함께 명성이 같았고 당나라 덕종(德宗) 때에 큰 이름을 떨친 노륜(盧綸)이라는 사람은 대력십재자(大曆十才子) 중의 한사람이었으며 하남(河南) 제원(濟源)의 노동(盧仝)도 특히 시문학(詩文學)에 뛰어나서 그가 지었던 수많은 다가(茶歌)는 오늘날까지 끊어지지 않고 즐겨 불리우고 있으며 지금도 ‘다박사(茶博士)’라고 불리고 있다.

당(唐)나라 때 노씨(盧氏)들 중에는 재주가 비상하고 신통한 능력을 가진 이인(異人)들이 많아서 기이(奇異)하고 신비(神祕)스러운 일화(逸話)를 많이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신의(神醫)’라고 불리우는 중국 의술(醫術)의 시조(始祖)인 편작(扁鵲)은 본명(本名)이 노부(盧附)이고, 현재 산동성 제남시 장청구에 편작의원(병원)이 있다. 수(隋)나라 말엽에 ‘신승(神僧)’으로 불리던 노사(盧師)는 용(龍)을 길들여 하늘을 날았으며, 그가 수도(修道)하던 절이 노사사(盧師寺)인데 ‘연성사(延聖寺)’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지금의 하북성 완평현(河北省 宛平縣)의 노사산(盧師山)에 현존(現存)하고 있다.

또 진(晉)나라 때 남양(南陽)지방의 노탐(盧眈)은 하늘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며 신선(神仙)을 만났다 하며 불교(佛敎)의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으로부터 28조(祖)가 되는 중국의 달마조사(達磨祖師)는 중국 불교 선(禪)의 1조(祖)이다.

 

이로부터 선(禪)의 육조(六祖)가 노혜능(盧慧能:六祖壇經의 曹溪慧能大師의 禪旨)이다. 노혜능(盧慧能)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집이 하도 가난하여 어머니를 봉양코자 나무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장작을 패다가 금강경(金剛經) 읽는 소리에 발심(發心)이 되어 오조(五祖)인 홍인(弘忍)의 상좌(上座)로 들어가 방아만을 찧으면서 선(禪)을 받았다 한다.

또한 그가 금강경을 외울 때 시중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이 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냐?”고 찾아와 문의하는 사람이 많았고 수행(修行)과 학문(學問)이 경지에 이른 다음에는 구름을 타고 사해(四海)를 노닐고 다녔다 한다.

또 위(魏)나라 무제(武帝) 때에 노녀(盧女)라는 여인(女人)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궁궐에 들어가 황제(皇帝) 앞에서 북을 치고, 가야금을 연주할 때 그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울려나오는 듯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하며 당(唐)나라 때 노미랑(盧眉娘)이라는 여인은 14세의 나이에 법화경(法華經) 일곱 권에 나오는 글자마다 수(繡)를 놓으니 오색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그 여인을 보려고 하자 구름을 타고 바다 위를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명(明)나라 때 이름 높았던 명장(名將)으로 노당(盧鐺)과 노상승(盧象昇)이 있었는데 노당은 명나라 중엽에 왜구(倭寇)가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바닷가로 유인(誘引)한 다음 단창(單槍)에 1,400여명의 목을 쳤다고 전해진다.

또 노상승은 명나라 말엽에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한 공(功)으로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오르고 그 명성이 오래도록 후세에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중국의 노씨(盧氏)들은 제(齊)나라 때 득성(得姓)을 한 이후로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정승(政丞)과 대유(大儒)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모두 노씨(盧氏)라는 성(姓)을 가진 사람들의 재능(才能)과 자질(資質) 및 학덕(學德)을 반증(反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