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노 서(盧 恕)

노 단(盧 亶)

노준경(盧俊卿)

노상인(盧尙仁)

노상의(盧尙義)

노상례(盧尙禮)

노상지(盧尙智)

노상신(盧尙信)

노 의(盧 毅)

노자원(盧自元)

노자형(盧自亨)

노자정(盧自貞)

 

 

생 애

㉮ 가문과 젊은 시절

㉯ 유배생활

㉰ 환로와 만년기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품성▶

㉮ 효제충신

㉯ 학자로서

㉰ 교육자로서

㉱ 도덕군자상

 

㉲ 관료생활

     

학문과 철학▶

한국유학의

   전래와그 주류

선생의 문집

시강록

숙흥야매잠해

 

인심도심변

㉳ 집중설

㉴ 동몽수지해

㉵ 선생의 사상

 

 

㉶ 선생의 추원록

 

 

 

 

노 숭(盧 嵩)

생 애

선생의 품성

업 적

 

현대인물


▣ 노 숭(盧 嵩)

 

2. 先生의 품성(品性)

선생의 품성을 비문과 기문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천성이 순후하신 중에도 스승 포은 정몽주 선생의 가르침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교적인 신조가 굳고 품성이 곧았다. 어려서부터 온화하며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겸손하고 자중(自重)하였다고 한다.

사환(仕宦)시절 국사에는 항상 부지런하고 정직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다.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놀기를 즐기지 않아서 음풍농월(吟風弄月)을 피하였다.

 

자녀에게는 항상 엄하면서도 관대하였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하는 마음과 근신(謹身)하는 태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할 때는 좋은 점을 들어서 말하였다 한다.무엇보다도 상촌선생(桑村先生)의 성품(性品)과 인간상(人間像) 지극한 효성(孝誠)과 뜨거운 민족애(民族愛)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의 부모에 대한 공경심(恭敬心)과 효행(孝行)은 다른 사람들의 모범(模範)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고, 선생의 충군애국(忠君愛國)은 고려에 이어서 건국된 조선에 있어서도 계속하여 이어졌다.

 

그것은 선생이 벼슬길에 오른 후로는 언제나 백성의 평안함을 제일(第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임금께는 항상 정직(正直)하고 충성(忠誠) 어린 말만을 간(諫)하였고, 자신의 말을 실천(實錢)할 줄 아는 신하(臣下)였다.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선생의 품성을 좀 더 면밀(綿密)하게 살펴 볼 수 있다.

 

“8월 초사일(갑진) 검교 의정부 우의정(檢校 議政府 右議政) 노숭(盧嵩)이 졸(卒)하였다. <중략(中略)> 관(官)이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러 왕명(王命)을 출납(出納)하는 것이 오로지 윤당(允當:타당함)하였다. 


그때 위주(僞主:高麗의 禍王을 말함)가 반유(盤遊:즐겁게 나가 노는 것)하기를 절도(節度)가 없이 하였는데, 어느 날 명(命)하여 어가(御駕:임금이 탄 가마)가 들(野)로 갔다가 마침 큰 비가 와서 냇물이 창일(漲溢)하니 노숭이 힘써 화복(禍福)을 주달(奏達:윗사람에게 말로써 여쭈어 알게 함)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諫)하였으므로 이에 위주가 잘못을 뉘우쳐 마음을 돌렸다.

 

그때 사람들이 그 경직(勁直:뜻이 굳고 곧음)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공(公)이 임술년(壬戌年)에 동지밀직 겸 대사언(同知密直 兼 大司憲)이 되었는데, 어느 날 위주(僞主)가 말을 달려 노숭의 정원(庭園)에 들어갔다가 “이것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종자(從者)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빨리 달려서 나가버렸다.

 

노숭이 자주 반유(盤遊)하는 것을 간(諫)하였기 때문에 위주(僞主)가 마음으로 이를 꺼려하였던 것이다. <중략(中略)> 노숭이 어미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도하여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데 어김이 없었고, 어미가 나이 93세로 죽으니 훌쩍훌쩍 뛰어 울부짖다가 기운이 꺾여서 쓰러졌으나, 상장(喪葬)은 예절을 다하였다. 신사년(辛巳年)에 참판 승추부사(參判 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니 전(箋)을 올려서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빌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중략(中略)> 노숭은 품성과 자질이 순후(純厚)하였는데 성품을 그대로 길러 겸손하였다. 관(官)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붕우(朋友)와는 공경하고 신의가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는 엄하였으나 어질었다.


경사(經史) 보기를 좋아하고 세속에서 서로 상대(相對)하는 문자(文字)로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데 검약(儉約)하는 것을 따르기에 힘쓰고 산업(産業)을 경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희유(嬉遊:즐겁게 노니는 것)를 좋아하지 않고 신불(神佛)을 섬기지 않아, <후략(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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