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빛낸인물

노 서(盧 恕)

노 단(盧 亶)

노준경(盧俊卿)

노상인(盧尙仁)

노상의(盧尙義)

노상례(盧尙禮)

노상지(盧尙智)

노상신(盧尙信)

노 의(盧 毅)

노자원(盧自元)

노자형(盧自亨)

노자정(盧自貞)

 

 

생 애

㉮ 가문과 젊은 시절

㉯ 유배생활

㉰ 환로와 만년기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품성▶

㉮ 효제충신

㉯ 학자로서

㉰ 교육자로서

㉱ 도덕군자상

 

㉲ 관료생활

     

학문과 철학▶

한국유학의

   전래와그 주류

선생의 문집

시강록

숙흥야매잠해

 

인심도심변

㉳ 집중설

㉴ 동몽수지해

㉵ 선생의 사상

 

 

㉶ 선생의 추원록

 

 

 

 

노 숭(盧 嵩)

생 애

선생의 품성

업 적

 

현대인물

 

▣ 노 수 신(盧守愼)

 

1. 생애(生涯)

 

가. 家門과 젊은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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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과회(寡悔), 호(號)는 소재(穌齋)ㆍ이재(伊齋)ㆍ암실(暗室)ㆍ여지노인(茹芝老人) 등이고,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선생(先生)의 고향은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化寜)으로, 1515년(中宗 10)년 음력 윤4월 16일에 한성부 남부 낙선방(漢城府 南部 樂善坊)의 한 우사(寓舍:임시 몸을 붙여 사는 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590년(宣祖 23)년 음력 4월 7일에 76세로 한양에서 별세하여 고향인 상주군 화령으로 반장(返葬)하였다.

 

소재(穌齋)선생의 관향(貫鄕)은 광주(光州)이고, 광주백(光州伯) 해(垓)의 후예로서, 고려시대 감문위 대호군(監門衛 大護軍)을 지낸 서(恕)는 중시조(中始祖)이며, 조선시대의 우의정(右議政)인 숭(嵩), 시호(諡號) 경평공(敬平公)이 한양에서 살았는데 그의 맏아들 상인(尙仁)이 혼인을 하면서 상주(尙州)로 옮겨 살았으며 그가 소재선생의 7대조이다.

 

선생(先生)의 5대조인 덕기(德基)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증조부(會祖父)인 경장(敬長)은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으로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였고, 조부(祖父)인 후(珝)는 풍저창수(豐儲倉守)로서 증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 左贊成)이었다.

아버지 홍(鴻)은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로서 증의정부영의정(贈議政府領議政)이었다.

 

소재(穌齋)선생은 나면서부터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스스로 옷을 입을 줄 알게 된 뒤로는 의젓함이 어른과 같았고, 6세에 학문을 시작하자 때때로 사람들이 듣고서 놀랄만한 부(賦:감상을 느낀 그대로 적은 한시)와 시(詩)를 지었다고 한다.

6살 되던 해에 어떤 사람이 붓을 선물하자,

 

原文: 比筆出於君 爲君能成文

未知何以報 他日登靑雲

 

풀이: 이 붓이 그대에게서 나왔으니, 그대로 인해 글이 능해지리라.

어떻게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 장차 청운의 길에 오르리라.

 

라고 부(賦)를 지어 답례하였다고 한다.

 

13세 때에는 소재(穌齋)선생이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동호(東湖)에 산책을 나갔을 때 호당(湖堂)의 학사(學士)들이 기생(妓生)을 보내어 선생을 부르자, 곧 붓을 꺼내어 일절(一絶)의 시(詩)로써 사절(謝絶)을 하였다고 한다.

 

原文: 雖遺紅裙訪我呼 我曹非是取歡娛

扁舟短掉歸來晩 勝水佳山也外圖

 

풀이: 누가 기생을 보내어 나를 부르는가.

나는 그러한 환오(歡娛)는 즐기지 않네.

작은 배 노 저어 돌아갈 길 늦구나.

승수가산(勝水佳山)은 세상 밖의 그림일세.

 

소재(穌齋) 선생은 17세에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혼인을 한 후, 탄수(灘叟) 선생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의 길과 자세에 대하여 듣고, 날마다 소학(小學)을 익혀 이를 일상생활의 표본(標本)으로 삼고 학문연구에 힘썼다고 한다.

 

소재(穌齋) 선생은 20세가 되던 해인 1534년(中宗 29)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는데, 첫닭이 울면 반드시 의관(衣冠)을 갖추었고 밤이 깊은 뒤에야 침상(寢牀)에 들면서 열성적으로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또한 행동거지(行動擧止)가 항상 장경(莊敬:정중하고 공경스러움)하고 조심(操心)함이 가득 찬 물그릇을 든 듯하여, 비록 동사(同舍)에 같이 있는 유생(儒生)들도 소재 선생의 상투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26세 때 성균관 지사(成均館 知事)로 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시습잠(詩習箴)을 지으라고 하여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는데, 유생들의 글이 모두 저열(低劣)하여 인재가 없음을 근심하다가 소재(穌齋) 선생의 글을 보고 크게 놀라 신기(神奇)라 여기면서, “이 사람이 당세에 큰 선비가 되겠다.”라고 말하였다 한다.

 

27세 때에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뵙고 소재(穌齋) 선생이 존심(存心:마음에 두고 잊지 않음)의 요(要:핵심)를 물었더니, 이언적이 손바닥을 보이면서 “여기에 물건이 있는데 꼭 쥐면 깨어지고 쥐지 아니하면 없어지느니라.” 하였는데, 이에 소재(穌齋) 선생은 ‘물망물조(勿忘勿助:잊지도 말고 급히 서두르지도 말라)’의 뜻을 깨닫고 학문연구에 더욱 힘썼다고 한다.

 

29세 때인 1543(中宗 38)년에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모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조선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선례(先例)를 남겼다. 3시(三試) 장원급제한 후 초임(初任)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었고, 곧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에 임명되었다가 1544년(中宗 39)년 정월에 시강원사서(侍講院 司書)에 임명되어 동궁(東宮:五世子 仁宗)에게 서전(書傳:5經)과 강목(綱目:國史의 요점만을 발췌한 책)을 강의하였다. 선생(先生)이 시강원직(侍講院職)에 205일간 재임하고 있을 때에는 성경(誠敬)의 설(說)과 학문적인 요지(要旨)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때 인종은 사벽(邪僻:마음이 비뚤어지고 편벽함)을 버리고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하는 일에 더욱 주력하였다.

 

1544(中宗 39)년 가을에 병조좌랑(兵曹佐郎)에 제수(除授)되자 곧 수찬(修撰)이 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함)를 하였는데, 이때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일직(日直:그날의 당직)을 같이 하면서 도의(道義)를 논(論)하는 즐거움이 많았다고 한다.

 

1544년 11월에 중종이 승하(昇遐)하자 인종이 즉위(卽位)하였고, 소재(穌齋) 선생은 1545년(仁宗 1)년 정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에 임명되자, “이기(李芑)는 너무나도 간사(奸邪)한데 높은 자리에 있음은 부당하다.”고 하여 탄핵(彈劾)ㆍ파직(罷職)시켰고, 先生은 곧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임명되었다.

인종(仁宗)이 8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하였고, 외척(外戚)인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가 합세하여 권세를 잡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히자, 소재(穌齋) 선생은 1545년(明宗 즉위)년 9월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547년(明宗 2)년에 순천(順天)으로 정배(定配)되었다. 그 해 가을에 양재역(良才驛) 벽상서사건(壁上書事件)이 일어나 을사사화에 연루(連累)된 여러 사람들에게 벌이 가중되자 소재(穌齋) 선생도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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