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빛낸인물

노 서(盧 恕)

노 단(盧 亶)

노준경(盧俊卿)

노상인(盧尙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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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의(盧 毅)

노자원(盧自元)

노자형(盧自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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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애

㉮ 가문과 젊은 시절

㉯ 유배생활

㉰ 환로와 만년기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품성▶

㉮ 효제충신

㉯ 학자로서

㉰ 교육자로서

㉱ 도덕군자상

 

㉲ 관료생활

     

학문과 철학▶

한국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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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문집

시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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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몽수지해

㉵ 선생의 사상

 

 

㉶ 선생의 추원록

 

 

 

 

노 숭(盧 嵩)

생 애

선생의 품성

업 적

 

현대인물

 

▣ 노 수 신(盧守愼)

 

1. 생애(生涯)

 

다. 宦路와 晩年期

명종(明宗)을 이어서 1567년에 즉위한 선조(宣祖)는 소재(穌齋) 선생의 학문과 능력을 크게 인정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서용(敍用:죄가 있어 파직당한 사람을 다시 임용함)하였다. 그 이듬해인 1568년(宣祖 1) 봄에 선생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 應敎)로 제수(除授)되었고, 6월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이 되고, 7월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이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 제수되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서 선조에게 글을 올려,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나이 많으신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청하였더니, 선조가 선생의 사정을 헤아려 특별히 고향에서 가까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제수하였다가 곧이어 충청도 관찰사(忠淸道 觀察使)에 제수하였다.

 

1568년 11월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슬퍼함이 지나쳐 발병(發病)하여 병이 위독하게 되었을 때, 선조(宣祖)가 친히 내의(內醫:왕의 주치의)를 보내고 약을 하사(下賜)하여 선생의 병을 고치도록 하였다.

1571년(宣祖 4)년에 3년 상을 마치자 곧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으로 옮겨졌으나, 선생은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노모를 한양으로 모시라는 명(命)을 내렸다.

1572년(宣祖 5)년 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을 겸하게 되었고, 곧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또 다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가을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승진되어 접반사(接伴使)에 뽑히었고 곧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대제학(大提學)을 겸하게 되었다.1573년(宣祖 6)에는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병이 생겨 5차례나 사직(辭職)하고자 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받게 하였다.

 

1577년(宣祖 10)에 인성왕후(仁聖王后)가 병이 나자 선생이 상신(上申:일에 대한 의견이나 사정을 웃어른께 말로나 글로 여쭘)하여 시약청(侍藥廳)이 설치되었고, 선생은 시약청의 도제조(都提調)가 되었다. 1578년(宣祖 11)에 우의정을 사직하고자 9차례에 걸쳐서 사표를 제출한 끝에 판충추부사(判中樞府使)가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는 좌의정(左議政)이 되었고, 23차례나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80년(宣祖 13) 9월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자 선조가 친히 승지(承旨)를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많은 부의(賻儀:초상집에 보내는 금품)를 하사하였으며, 경상도(慶尙道)에 특명을 내려 상여(喪輿)를 호상(護喪:초상 일을 도맡아 보살핌)하도록 하였다.

 

1585년(宣祖 18)에는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관직에서 떠나고자 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허락지 않았으며, 궤장(几杖:앉아서 팔을 기대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영의정(領議政)을 제수하였다. 영의정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 19차례에 걸쳐 거듭 사직하고자 간청하여 1588년(宣祖 21)에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지만, 이 관직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양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590년(宣祖 23)에 지난날 정여립(鄭汝立)을 천거(薦擧)하였던 일로 판중추부사에서 면직 당하였고, 이를 마지막으로 선생의 환로(宦路:벼슬길)는 끝을 맺게 되었다.

 

1590년 3월 12일에 정경부인(貞敬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가 세상을 떠났고, 같은 해 4월 7일에 소재(穌齋) 선생도 7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선생은 상주(尙州) 화령(化寜)의 선산(先山:조상의 묘가 있는 곳)에 반장(返葬)되었고, 부인도 선생과 함께 부장(附葬:한 무덤에 함께 장사 지냄)되었다.

 

묘표(墓表)는 선생이 손수 지으신 명(銘)을 썼는데, 그 일구(一句)를 보면 “소사(小事)에 흐리어 혹(或) 죄가 되었으나 대의(大意)가 분명하니 참으로 부끄러움이 없도다…”라고 씌어 있다. 선생은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를 조카 대해(大海)로 하였는데, 대해의 관직은 영천군수(永川郡守)였다.

후배(後配:후실)에서 낳은 아들로는 계래(戒來), 계난(戒難), 계후(戒後) 등 셋이 있고, 사위로는 파주목사(坡州牧使) 허징(許徵) 한 사람이 있었다. 훗날 선생의 묘소는 봉산(鳳山)으로 이봉(移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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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조부 좌찬성공(휘 후) 묘소(후)와

부친 령의정공(휘 홍) 묘소

소재:경북 상주시 화북면 소곡 원천동 산1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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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묘소(정경부인 합부)

소재:경북 상주군 화서면 금산리 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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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찬성공(휘 후) 신도비(경북지방문화재 220호)

증 령의정공(휘 홍)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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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재:문간공 묘소 재실

소재:경북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봉산

 

 

4) 선생의 시호(諡號)

소재(穌齋)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진도(珍島)의 유생(儒生)들은 교화지조(敎化之祖)에 대한 예(禮)를 갖추어 1603년(宣祖 36)에 봉암서원(鳳巖書院)을 창건(創建)하여 춘추향사(春秋享祀)를 지냈고, 상주(尙州)의 봉산서원(鳳山書院)과 도남서원(道南書院), 충주(忠州)의 팔봉서원(八峰書院), 괴산(槐山)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配享)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제사)를 지냈는데, 지금도 진도의 봉암서원을 제외하고 유림(儒林)들이 모여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진도의 봉암서원은 인조(仁祖) 때 왕명(王命)으로 향촉(香燭), 제복(祭服), 제구(祭具), 제답(祭畓) 등을 하사받아 춘추제향(春秋祭享)에 이용하였다. 그 후 봉암서원에는 이경여(李敬輿), 정홍익(鄭弘翼), 김수항(金壽恒) 등 세 분이 추배(追配)되었고, 1684년(肅宗 10)에는 서원(書院)을 성(城)의 동북2리(東北二里:현재의 東外里 堂洞部落의 동북쪽 골짜기)로 옮겨 지어 남이성(南二星), 신명규(申命圭), 이민서(李敏敍) 등 세 분과, 조금 늦게 조태채(趙泰采) 선생을 추배하였는데, 고종(高宗) 때 훼철(毁撤:헐어내어 걷어버림)되어 소재(穌齋) 선생의 위패(位牌)는 일제시대 때 사당(祠堂)에 모시고 향사(享祀)를 지냈다고 전한다.

 

선생의 제사(祭祀)는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대(代)에 관계없이 영원토록 제사지내는 사당)에 유현(儒賢)의 예(禮)를 따라 경북 상주군 화서면 사산리(慶北 尙州郡 化西面 沙山里)의 옥연사(玉淵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선생의 시호(諡號:죽은 후에 나라에서 공이 많은 사람에게 주는 호)는 1694년(肅宗 20)에 숙종이 여러 대신(大臣)들, 특히 대제학(大提學) 하계(霞溪:權愈)와 병조판서(兵曹判書) 백인당(百忍堂:兪夏益) 등의 진언(眞言)을 듣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곧 예조정랑(禮曹正郎) 이만근(李萬根)을 보내어 선생의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에 치제문(致祭文:공적이 많았던 신하에게 내리는 제물)을 내리고 제사(祭祀)를 지냈는데, 치체문의 내용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는데 태산과 같은 공이 있고, 임금을 지극히 섬기며, 항상 백성을 걱정하여 옳은 제도(制度)를 실시하고, 효심이 지극했으며, 글을 잘 썼다.”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선생의 많은 업적을 찬양하였고, 후사(後嗣)에게 벼슬을 주어 청빈(淸貧)으로 인한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 불천위 사당(不遷位詞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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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文簡公) 소재(穌齋) 선생은 양관대제학을 거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정승으로 14년간을 역임한 후 판중추부사로 이선에 물러났을 때 76세로 돌아가셔서 자손들이 선생의 위패(位牌)를 사당에 모셨는데 체천(遞遷:사(死)후에 4대를 모시다가 5대째는 위패를 조매(祧埋:위패를 땅에 묻음)한다.) 전에 시호 교지와 사제문을 받으며 왕(肅宗)의 불천위 명에 따라 체천 없이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되었는데 지금도 돌아가신 날(음력 4월 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러한 사당을 일러 불천위사당 혹은 부조묘(不祧廟)라 하는데 선생의 부조묘는 사당(삼간)과 내문 제실 외삼문으로 이루어졌고 옥연사 동편에 세워져 있다.

 

 

 

◎ 봉산서원(鳳山書院):상주시 화서면 금산리 봉산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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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山書院

 

봉산서원은 소재(穌齋) 선생의 장구지소(杖屨之所:지팡이를 짚고 짚신으로 걷던 길이니 지금의 산책로)로써 고향에 오면 늘 들리던 곳이다. 화령(化寜)에서는 유일하게 서당으로서 이름이 났던 곳인데 1708년(肅宗 34)년에 예조의 승인을 받아서 서원으로 승격하고 사당을 지어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선생을 주벽으로 모시고 문인(門人)이었던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공과 판곡(板谷) 성윤해(成允諧) 공을 배향으로 하여 봄가을로 향사를 함은 물론 이 지방의 젊은이를 모아 학업을 닦게 했던 곳이다. 후에 다시 배향으로 성극당(省克堂) 김홍미(金弘微), 이재(頤齋) 조우인(曺友仁),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 백화재(白華齋) 황익재(黃翼再) 공을 모시고 향사와 원생의 교육을 하다가 1868년(高宗 5)년에 훼철 당했다.

일찍이 소재선생이 이곳에 와서 지은 시가 있다.

今宰臨歸德 고향에 와 보니 상주의 수령이

書堂起化寜 화령현에 서당을 세워 놓았다.

當時鹿洞意 당시는 녹동의 뜻을 따라서 세웠겠지.

今日鳳山名 지금의 이름은 봉산서당일세.

有傑興規制 뛰어난 사람이 있어 규제를 갖추어 일으켰으나

無人請額經 액이나 책을 청구한 사람은 없었네.

回頭二十載 돌아보니 2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不死老先生 노선생은 변치 않고 글공부를 시키는구나.

 

서원이 철폐되자 유림들은 이곳에 설단(設壇)을 하였던바 서원의 강당은 상당기간 남아 있었으나 퇴락(頹落)하여 헐었고 수십 년이 지난 1975년에 유림의 공의(公議)로 사당을 짓고 향사를 해 왔는데 마침내 퇴락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당을 지었으나 강당 등의 예산을 충분히 받고자 노력 중에 있다.

 

상향축문(常享祝文)

 

敬直義方德崇道光三達俱存百世彌章

 

경직의방(敬直義方)하고 덕은 높고 도는 빛났으며 삼달(官爵ㆍ方壽ㆍ德)존이 구비하니 백세토록 더욱 빛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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