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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단(盧 亶)
공(公)의 휘(諱)는 단(亶)이니 고려시대에 벼슬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좌우위대호군(左右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70세가 넘어서 벼슬을 사양함)하였다. 공(公)은 중시조(中始祖) 대호군 서(恕)의 아들이다. 공의 언행사적이 문헌에 없으므로 이제 비록 상세하게 알 수 없으나 가히 공의 관홍명지(寬弘明智)의 자질로써 임금을 보필하니 군신의 뜻이 맞아 총애를 꾸준히 받아서 이러한 고위직에 올라서 끝까지 절개를 지켜 그 풍교덕업(風敎德業)이 위연(偉然)하여 가히 후세에 서술할 만함을 상상할 수 있다.
무릇 우리 후손 중에 단서(端緖)를 찾아보려는 뜻있는 사람은 그 근본이 이러함을 알지 못하고서 보수(保守)함을 생각하여 그 지기(志氣)에 감발(感發)함이 없겠는가! [시운(詩云:詩傳)]에 이르기를 “즐겁다. 군자는 덕음(德音)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로써 가(家)에 거(居)하고 조정에 입(入)하였기에 반드시 아무 결점 없이 그 하늘의 녹을 향유해서 후손에게 끼친 것이 대체로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아들의 휘가 준경(俊卿)이니 벼슬이 사헌부 지평이며 충혜왕 때 순절하였고, 손(孫)의 휘는 숭(嵩)이니 호는 상촌이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니 조선시대 들어와서 덕업과 공훈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고 후손이 번성하여 대마다 혁혁하니 공의 적덕(積德)한 징험(徵驗)이 이에 이른 것이다.
당세의 사실을 기록하고 가히 천할 만한 것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나 모두 빠져서 백에 하나도 없으니 상상컨대 지평공은 절의로써 순국하였고 경평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수습(收拾)을 못한 까닭에 비록 능문호사자(能文好事者)가 있을지라도 그 사이에 붓을 대지 못하였을 것이다.
參考文獻:光山盧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