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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준경(盧俊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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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형(盧自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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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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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물

 

▣ 노 수 신(盧守愼)

 

2. 선생의 품성(品性)

 

라. 도덕군자상(道德君子像)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는 성현(聖賢)이라 하고 소재(穌齋) 선생은 화담(花潭), 퇴계(退溪), 노사(盧沙), 한주(寒洲), 녹문(鹿門) 등과 함께 도덕군자(道德君子)에 속한다.

현대사회에서도 도덕군자라는 말은 가끔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의미가 본래의 뜻과는 다소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유(儒)의 측면에서 도덕군자의 올바른 의미를 살펴보면, 유(儒)란 천지의 변화와 만물의 정상(情狀)을 이해하고 이에 순응(順應)하며 살아갈 인생의 도리를 터득하여 스스로 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도덕의 실천이 유(儒)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에 문(文)과 예(藝)를 달성하는 곳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군자(道德君子)의 수업에 힘을 써서 유(儒)가 추구하는 인간성취(人問成就)의 이상(理想)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도덕군자의 도(道)는 천리(天理)를 뜻하는 것이고, 덕(德)은 도를 통하여 체득한 품성(品性)을 뜻하는 것으로 [논어(論語)]에서는 “덕행본야, 문예말야(德行本也, 文藝末世:덕행이 근본(시작)이고 문예가 끝맺음이다.)”고 하였다.

또한 도덕은 맹자가 말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사덕(四德:또는 四性) 중 인(仁)을 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군자는 학식과 덕망이 아주 높은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을 말하는 것으로 소인(小人)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상과 같은 도덕군자의 본래의 뜻을 바탕으로 몇 가지 일화(逸話)를 통해 선생의 인간상을 살펴보면,

 

◎ 일화 1(逸話 一)

선생과 윤춘년(尹春年)은 어릴 때 같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같이 한 친구사이였는데, 을사사화 때 소윤파(小尹派)의 한 사람이 된 윤춘년이 매일 선생을 찾아와 무엇인가 말을 할 듯 말 듯 하기에 선생은 그의 뜻을 미리 짐작하고, 이웃 친구였던 이민덕(李民德)을 불러 윤천년으로 하여금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였다. 그래서 결국 선생이 화(禍)를 당하여 진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윤춘년이 사람들에게 “그 때 과회(寡悔:소재선생의 字)에게 살아남을 길을 알려주려 했으나 이민덕이 항상 그의 옆에 붙어있어 말할 틈이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先生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그 말을 전해 듣고 “내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 그 때 일의 덕이다.

만약 그 때 윤춘년의 말을 듣고 그대로 따르지 않았으면 나를 죽였을 것이고, 그의 말을 따랐다면 나는 평생을 버렸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는 곧 선생의 곧은 선비정신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지혜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 일화 2(逸話 二)

선생이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부마(駙馬:공주의 남편)인 신의(申檥)도 또한 진도로 유배되어 왔는데, 신의가 매 다섯 마리로 꿩 사냥을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선생은 손수 기르던 매를 날려 보내고 “매로 인하여 양쪽 집의 하인들이 서로 싸움을 일으킬까 걱정되어 나의 매를 날려 보냈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신의는 가시 울타리를 쳐 놓은 유배소(流配所)를 빠져 나와 촌락(村落)을 돌아다니며 민폐(民弊)를 끼치곤 하였는데, 진도를 관할하고 있던 군수(郡守)가 사유(事由)를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보고하자 신의는 그 보고서를 쓴 서리(書吏)를 납치하여 그의 손을 자르려 하였다. 이를 알고 크게 놀란 서리의 가족들이 속임말로 “노좌랑(盧佐郞:소재 선생)이 또 온다.”고 하였더니, 신의가 “서리를 속히 풀어 주어라.”고 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신의가 나쁜 일을 저지르면 항상 “노좌랑이 아느냐?”고 하였다 한다.

 

이것은 바로 선생의 높은 덕망(德望)때문이었고, 선생의 고매(高邁)한 인품에서 풍겨 나오는 기상이 출중하였기 때문이다.

 

◎ 일화 3(逸話 三)

선생의 유배지를 관할하던 군수(郡守)들 중에 홍인록(洪人祿)이란 이가 있었는데, 이 군수의 박해(迫害)가 극심하여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도민(島民)의 교화에 감사한 진도의 도민들이 어느 날 선생께 약간의 쌀을 드렸는데, 이를 알게 된 홍인록은 “죄인이 어찌 옥식(玉食: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그 쌀을 모두 기장(조와 비슷한 곡식으로 지금은 가축사료로 쓰임)으로 바꾸어 주였다 한다.

또 어느 달 밝은 밤에 어린 종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홍인록은 이를 알고 “죄인이 어찌 감히 연락(燕樂:편안히 즐김)할 수 있는가.”라고 하고는 어린 종을 옥에 가두었다 한다.

 

훗날 선생이 선조(宣祖)에게 서용(敍用)되어 중요한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홍인록을 공박(攻駁)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이를 알고 홍인록을 구제하고 오히려 풍천부사(豊川府使)로 영전(榮轉)시켜 주었다. 이는 선생이 모든 생각과 행동에서 도덕군자의 본보기였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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