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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수 신(盧守愼)
2. 선생의 품성(品性)
마. 관료생활(官僚生活)
선생은 집상기(執喪期:어버이 喪事에 예절을 지키는 기간) 2년간을 제외한 10여 년간을 정승(政丞)으로 있었는데 이는 선조가 선생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결과이다.
또한 선생은 훌륭한 인재(人材)들을 등용(登用)시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룩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권세(權勢)에 아부하지 않고, 항상 공정(公正)함을 지녀 사심(私心)을 버렸으며, 학문적 이론(學問的 理論)들을 정사(政事)에서 펼쳐 나갔다.
사간원(司諫院)에 재임(在任)하고 있을 때 재상(宰相)의 자리에 있는 이기(李芑)를 소인(小人)이라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을사사화 때 화(禍)를 당해서도 선비정신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이기 등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하였다. 우의정(右議政)으로 있을 때에는 당쟁(黨爭)의 조짐이 있음을 걱정하고 그 원인이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다툼에 있었으므로 두 사람을 모두 외직(外職)으로 내어보냈다.
선생이 왕(王)에게 천거(薦擧)한 중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1573년(宣祖 6)년에 왕명(王命)에 따라 학행(學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였는데, 조목(趙穆), 이지함(李之菡), 유몽학(柳夢鶴), 홍가신(洪可臣), 김천일(金千鎰), 기대정(奇大鼎), 최영경(崔永慶), 유몽정(柳夢井) 등을 천거하여 6품직(六品職)에 오르게 하였다.
1575년(宣祖 8)에는 경연(經筵:임금 앞에서 經書를 강의하던 곳)에서 허엽(許曄), 이이(李珥), 민순(閔純) 등을 천거하였고, 장재(將材: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최응룡(崔應龍), 박민헌(朴民獻), 최현(崔顯), 이지함(李之菡), 김찬(金璨) 등을 천거하였다.
1579년(宣祖 12)에는 대제학(大提學)으로 이산해(李山海), 이이(李珥), 구봉령(具鳳齡), 허봉(許篈) 등을 천거하였고, 1583년(宣祖 16)에는 우의정(右議政)으로 정유길(鄭惟吉)을 천거하여 우상(右相)에 오르게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 외에도 선생의 많은 업적들과 행적(行蹟)이 있겠으나 아직 발견된 자료들이 많지 않아 선생의 환로(宦路)와 관료생활을 살펴보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고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