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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學問과 哲學

 

라. 夙興夜寐箴解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숙흥야매는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부지런히 일함을 뜻하고, 잠은 경계하는 말을 뜻한다.)]은 남당(南塘) 진무경(陳茂卿)이 스스로를 경계(警戒)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일찍이 금화(金華) 왕노재(王魯齋)가 태주(台州)의 상채서원(上蔡書院)에서 교육을 맡았을 때 이 잠(箴)을 가르쳐 글을 배우는 사람마다 모두 외우고 익혀서 실천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진도에 있을 때 처음으로 이 잠(箴)을 주해(註解)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서신(書信)으로 서로 토론하고 다시 정리하여 학문하는 선비들의 생활지침서(生活指針書)로 세상에 펴냈다.

 

퇴계 선생에게도 이 주해서(註解書)를 증여(贈與)하였는데, 퇴계 선생은 이를 [성학십도(聖學十圖)]의 하나인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로 만들어 왕에게 올렸으며, 퇴계 문집에도 선생이 증여한 주해서가 포함되어 있다(與盧守愼論夙興夜寐箴註解書).

 

※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原文:夙興夜寐箴

鷄鳴而寤思慮漸馳盖於其間澹以整之或省舊 愆或紬新得次第條理瞭然默識 本旣立矣昧爽乃興盥櫛衣冠端坐斂形提掇此心皦 如出日嚴肅整齊虛明靜一 乃啓方冊對越聖賢夫子在坐顔曾後先聖師所言親切 敬聽弟子問辨反覆參訂 事至斯應則驗于爲明命赫然常目在之事應旣己我 則如故方寸湛然凝神息慮動靜循環惟心是監靜 存動察勿貳勿三 讀書之餘間以泳發舒精神休養情性 日莫人倦昏氣易乘齊莊整齊振拔精明 夜久斯寢齊手斂足不作思惟心神歸宿 養以夜氣貞則復元念玆在玆日夕乾乾

 

풀이:닭이 울어 잠을 깨면 이러저러한 생각이 점차로 일어나게 된다.

어찌 그동안에 조용히 마음을 정돈하지 않겠는가. 혹은 과거의 허물(舊愆)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새롭게 깨달은 것을 생각해 내어 차례로 조리를 세우며 분명하게 이해하여 두자. 근본이 세워졌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안색을 가다듬은 다음 이 마음이끌기를 마치 솟아오르는 해와 같이 밝게 한다. 엄숙히 정제하고 마음의 상태를 허명정일(虛明靜一)하게 가질 것이다.

 

이때 책을 펼쳐 성현들을 대하게 되면 공자(孔子)께서 자리에 계시고 안자(顔子)와 증자(曾子)가 앞뒤에 계실 것이다. 성현의 말씀을 친절히 경청하고 제자들의 문변(問辨)을 반복하여 참고하고 바로 잡아라.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 천명(天命)은 밝고 밝은 것으로 항상 여기에 눈을 두어야 한다.

 

마음(方寸)을 고요히 하고 정신을 모으며 잡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동(動)과 정(靜)이 순환하는 중에도마음만은 이것을 볼 것이다. 고요할 때는 보존하고 움직일 때는 살펴야 하지만 마음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려서는 안 된다.

 

독서하고 남은 틈에는 틈틈이 쉬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성정(性情)을 길러야 한다. 날이 저물고 사람이 권태로워지면 흐린 기운(昏氣)이 엄습하기 쉬우니 장중히 가다듬어 밝은 정신을 떨쳐야 한다.

밤이 늦어지면 잠자리에 들되 손을 가지런히 하고 발을 모으라. 잡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심신(心神)이 돌아와 쉬게 하라. 이 심신을 야기(夜氣)로써 길러 나가라.

이미 정(貞)이면 원(元)에 돌아오느니라.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여기에 마음을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라.

 

선생은 이 주해서(註解書)의 결론부분에서, [숙흥야매잠] 전체의 강령(綱領)은 경(敬)에 있고 경(敬)의 실천방법은 전일(專一:오로지 하나가 됨)에 있으니, 성경(誠敬)과 전일(專—)이 그 덕(德)이나 학문함에 있어 동일하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原文:謹按一篇綱領 專在於敬 敬者一而已矣

 

풀이:삼가 살피건대 한 편의 강령은 모두 공경(恭敬)하는데 있으니, 공경이라는 것은 하나뿐이다.

 

라고 하여 숙흥야매잠의 구절(句節)이 모두 전일(專一)에서 나온다고 설명하였으며, 다시 나아가,

 

原文:夫一 在天曰誠 在人曰敬 蓋天地之間 惟天理爲一 若所謂誠者天之道也 有生之類 惟聖人之心爲一 若所謂誠者聖人之本也 天與聖人豈有間哉 至於衆人 始有不能一而一之者 若所謂敬者人事本也 故學者體天之誠 以求至於聖人之誠則亦惟用力於敬而已 敬者何 一也 內而一念之一 亦敬也 外而一視之一 一聽之一 亦敬也 一言之一 一行之一 亦敬也 至於靜中有物 則一者亦敬也 是其內外動靜之精粗 雖有不同 然其義之所歸 則未始不在於一也.

 

풀이:무릇 하늘에 있는 것은 성(誠)이고, 하나에 있는 것은 경(敬)이니, 모든 천지간(天地間)에는 오직 천리(天理)만이 「하나(一)」가 된다. 이와 같이 소위 성(誠)이라는 것은 하늘의 도(道)이니 이것이 생겨나는 곳은 오직 성인(聖人)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또한 성(誠)이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근본(根本)이니 하늘과 성인은 같은 것으로 어찌 차이(間)가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처음에는 능히 하나가 되지 못하다가 나중에 이르러서는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른바 경(敬)이라는 것은 인사(人事:사람의 일)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학문하는 사람은 하늘의 성(誠)을 몸소 얻어 성인(聖人)이 성(誠)에 이르기를 구(求)한다면 오직 경(敬)에만 힘을 써야 한다.

경(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일(專一)이다.

 

안으로는 하나의 생각(一念)이 경(敬)이고, 밖으로는 하나로 보이고(一視), 하나로 듣는(一聽)것이 경(敬)이다. 또한 하나의말(一言)과 하나의 행동(一行)이 경(敬)이다. 고요한 가운데 물건이 있음에 이르는 것은 곧 하나(一)가 경(敬)이 되는 것이 같다. 이것은 그 안팎(內外)과 동정(動靜)이 정교(精巧)하고엉성한 것에 있어 비록 같지 않음이 있으나 그 의(義)로 돌아가는 것과 같으니, 처음부터 하나(一)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라고 하여 성경(誠敬)과 전일(專一)이 그 덕(德)을 똑같이 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한 소재(穌齋) 선생은,

 

原文:先生作箴 以箴學者 自夙興至於夜寐自復夜寐至夙興 功夫有倫 警省有要 使無時無處而不力於一 則一者此箴之旨也.

 

풀이:남당(南塘) 선생이 이 잠(箴)을 지어서 학문하는 자를 경계하였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늦은 밤에 잘 때까지 공부(工夫)에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道理)가 있고, 경계하고 반성함에는 중요한 길(要)이 있어서, 이로 하여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하나(一)에 힘쓰지 않음이 없는 즉, 하나(一)라는 것은 이 잠(箴)의 근본 되는 뜻(旨)이다.

 

라고 하여 전일(專一)에 힘쓰는 일이 숙흥야매잠의 요지(要旨)임을 밝힌 후에,

 

原文:玩此箴者 須將記(禮記)之毋不敬 易之敬以直內 程門敬字之法 朱子畏字之說以參之 則一之爲義可知也 竊觀通書 曰聖可學乎曰可 有要乎曰有 請問焉 曰一爲要 一者無欲也 無欲則靜虛動直 靜虛則明 明則通 動直則公 公則溥 明通公溥庶矣乎 故愚讀此箴而未嘗不反覆於斯云.

 

 

풀이:이 잠(箴)을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예기(禮記)에 공경(恭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주역(周易)에서도경(敬)이 그 내용을 곧장 통하고 있다는 것, 정문(程門:程明道와 程伊川)에 경(敬)자의 법(法)과 주자(朱子)에 외(畏)자의 설(說)을 참고하다면, 곧 하나(一)가 의(義)가 됨을 가(可)히 알 것이다. 통서(通書)를 가만히 살펴보면, 성(聖)을 배울 수 있는가? 그것은 가능하다. 요점(要點)이 있는가? 그것이 있다.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하나(一)가 요점이 되며 하나(一)라는 것은 욕심(慾心)이 없는 것이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곧 깨끗하고 사심(私心)이 없으며(靜虛), 곧게 움직이는 것(動直)을 말한다. 깨끗하고 사심이 없는 것은 곧 밝음(明)이고, 밝음은 곧 통(通)함이다. 곧게 움직인다는 것은 곧 공정함(公)이고, 공정함은 곧 넓음(博)을 말한다. 밝음과 통함과 공정함과 넓음은 서로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잠(箴)을 읽고 일찍이 반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라 하여 학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공경(恭敬)과 전일(專一)에 힘쓸 것을 역설(力說))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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