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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수 신(盧守愼)
3. 學問과 哲學
마. 人心道心辨
아직 선생의 문집이 완역(完譯)되어 있지 않고, 더욱이 先生의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에 관해서는 충분히 연구된 상태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들이 주장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의 요체(要諦)와 선생의 인심도심변의 요지(要旨)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朱子(朱晦庵)
주자의 인심도심사상은 4단 7정론(四端 七情論)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그는 중용 장구서(中庸 章句序)에서,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오직 자세하다. 모든 일은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性一 允執厥中).”고 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에 도심이 있으면 인심(즉, 인욕)이 없어지고, 인욕이 도심을 이기면 천리(天理)가 멸(滅)한다고 하였다. 즉 천리(도심)와 인욕(인심)은 한 마음에 동시공존(同時共存)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천리와 인욕은 항상 서로 대적한다(天理人欲 常相對).”고 하였다.(語類卷 13)
2) 程子(程伊川)의 人心道心說
정자는, “인심(人心)은 사욕(私慾)인고로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천리(天理)인고로 정미(精微:정확하고 미세함)하다. 사욕을 버리면 천리가 밝아진다.”고 하였으며, “인심(人心)은 인욕(人慾)이요, 도심(道心)은 천리(天理)이다. 인심은 오직 위태로우니 인욕이요, 도심은 오직 자세하니 천리이다.”라고 하였다.
3) 退溪의 理氣論과 人心道心說
퇴계는 인간(人間)을 중심으로 하여 이기(理氣)를 해명(解明)함으로써 그 해명을 가지고 자연(自然)까지 추리(推理)하게 되고, 퇴계가 인간을 출발점(出發點)으로 함에 있어 인간존재(人間存在)의 이성(理性:즉, 道心)과 감성(感性:즉, 人心)의 양면(兩面)을 이(理)와 기(氣)에 분배(分配)함으로써 우주자연(宇宙自然)에 있어서도 이동기동(理動氣動)의 호동(互動:서로 움직임)이라는 세계관(世界觀)을 수립 (樹立)하였다.
대개 사람의 일신(一身)은 이(理)와 기(氣)가 합(合)해져서 생(生)긴 것이고, 사람에게는 이성과 감성의 양면이 있는 것으로 이성은 도의심(道義心) 즉, 도심(道心)으로서 순선(純善:순순한 선)이지만, 감성은 사욕(私慾)과 함께 일어나는 것으로 보통 말하는 인심(人心)으로서 유선악(有善惡:선과 악이 있음)이다.
퇴계는 이(理)를 존중하고 기(氣)를 천시하였고(즉, 理尊氣卑의 思想), 도심(道心)이나 4단(四端)은 이(理)가 발동(發動)하여 나타난 정(情)으로 순선(純善)이고, 인심(人心)이나 7정(七情)은 기(氣)가 발동(發動)하여 나타난 정(情)으로써 유선악(有善惡)이라 하였는데(즉,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7정(七情)과 4단(四端)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나누어서 대칭(對稱)시켜 말하기를,
「人心 七情是也 道心 四端是也」
(退溪集 卷36, 答李宏仲問目)
人心은 七情이 이것이요, 道心은 四端이 이것이다.
「人心爲七情 道心爲四端」
(退溪集 卷37, 答李平叔)
人心은 七情이 이것이요, 道心은 四端이 이것이다.
라 하였다. 결국 퇴계의 생각은 인심(人心)은 인욕(人慾)으로서 7정(七情)임에 틀림이 없으며, 도심(道心)은 널리 심(心)이라 말하는 것으로써 그것은 심발동(心發動)의 시종(始終)이나 유무(有無)를 다 통(通)해서 말하는 것이고, 4단(四端)은 다만 그 발현(發顯)의 단서(端緖:어떤 일의 실마리)만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그 의취(意趣:의지와 취향)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심(道心)은 또한 천리(天理)에 있는 것이므로 4단(四端)과 그 내용에 있어서는 같다는 것이다.
4) 栗谷의 理氣論과 人心道心說
율곡은 자연(自然)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이기(理氣)를 설명함으로써 그 원리(原理)를 가지고 인간(人間)까지 관통(貫通)한다. 즉, 자연(自然)의 생성(生成)을 기화리승(氣化理乘)이란 이기일도(理氣一途)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수립하였다.
인심도심(人心道心)과 4단(四端)과 7정(七情)의 연원(淵源)을 보면 4단(四端)은 [맹자(孟子) 권3(卷三) 공손축장구상(公孫丑章句上)]에 나오는 것으로서 사람의 성(性)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덕(四德)을 고유(固有)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란 4단(四端:4개의 情)이 나타난다는 것이요,
7정(七情)은 정이천(程伊川)이 말한 그의 논문(論文) [언자소호하학론(諺子所好何學論) 이정전서(二程全書) 卷62]에서 논한 것으로 사람의 마음의 발동(發動)은 대상(對象) 외물(外物)이 형기(形氣:感覺)에 접촉(接觸)하면 형기(形氣)가 외감(外感)하매 중(中:心中)이 동(動)하여 발출(發出)하는 것으로 희로애락애악욕(喜怒哀樂愛惡慾)의 7정(七情)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4단 7정(四端 七情)에 관한 율곡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原文:心一也 而謂之道, 謂之人者 性命形氣之別也, 情一也而或曰四或曰七者, 專言理兼言氣之不同也, 是故人心道心, 不能相兼, 而相爲終始焉, 四端不能兼七情, 而七情則兼四端…四端不知七情之全, 七情不如四端之粹, 是則愚見也
(栗谷全書 卷9, 答成浩原)
풀이: 心은 하나뿐인데, 이것을 道心이니 人心이니 말함은 性命(人性과 天命을 말함)과 形氣(形狀과 氣運)를 말함의 區別이요, 情도 하나뿐인데, 四 혹은 七이라 말함은 理를 專言(오로지 말함)과 氣를 兼言(함께 말함)함의 不同이다. 이런고로 人心과 道心은 서로 겸할 수는 없고, 서로 終始하는 것이다. 四端은 七情을 겸할 수 없으나, 七情은 四端을 겸한다. … 四端은 七情의 全部임과 같지 아니하고, 七情은 四端의 순수(純粹)함과 같지 아니하다. 이것이 나의 所見이다.
라 하였다.
그런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서로 종시(終始)한다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율곡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명(解明)한다.
原文:今人之心 直出於性品之正 而或不能順而遂之 間之以私意 則是始以道心 而終以人心也 或出於形氣 而不咈乎正理 則固不遠於度心矣 或咈乎正理 而知非制伏 不從其欲 則是始以人心 而終以道心也
(栗谷全書 卷9, 答成浩原)
풀이:이제 사람의 마음이 性命之正에서 直出하여도 或 順遂하지 못하여 이 사이에 私意가 介在하게 되면, 이는 처음에는 道心이다가 마침내는 人心이 되고, 或形氣에서 生해도 正理를 거슬리지 아니하면 진실로 道心과 다름이 없다. 或 正理를 거슬려도 그 非를 알아 이를 制伏함으로써 그 欲을 좋지 아니하면, 이는 처음에는 人心이다가 마침내는道心이 된다.
다시 요약(要約)하면, 사람의 마음이 이의(理義)를, 위하여 성명지정(性命之正)에서 곧게 도심(道心)으로서 나와도 그 사이에 식색구체(食色口體)를 위한 사욕(私慾)이 그것을 가로 막으면, 처음은 도심(道心)일지라도 마침에는 인심(人心)으로 바뀌고, 그 반대로 혹(或) 형기(形氣)의 사의(私意)에서 나옴으로 정리(正理)에 거슬려도 그 비리(非理)를 알아 그것을 제복(制伏)함으로써 그 사욕(私慾)을 좋지 아니하면, 처음에는 인심(人心)일지라도 마침내는 도심(道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서로 종시(終始)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은 퇴계의 이존기비(理尊氣卑)의 사상인 이발기수(理發氣隨)를 부인(否認)하고 다만 기발리승(氣發理乘)만을 인정(認定)하였는데, 퇴계와 율곡의 후계자(後繼者)들은 퇴계의 주리파(主理派)와 율곡의 주기파(主氣派)의 양파(兩派)로 대치(對峙)하게 되었고, 그 중간적(中間的)인 절충파(折衷派)가 생겨났는데 소재(穌齋)선생은 절충파에 속한다.
5) 鮮齋先生의 人心道心辨
선생은 명(明)의 나정암(羅整庵)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인용(引用)하여 정주학(程朱學)의 체계확립(體系確立)에 크게 기여하였다. 나정암은,
原文:道心體也 至靜之體不可見 故曰微 人心用也 至變之用不可測 故曰危
풀이:道心은 體(즉, 靜)이다. 體는 고요하므로 볼 수가 없다. 그런고로 精微하다. 人心은 用이다. 用은 變化가 있어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런고로 危殆롭다.
고 하여 체용설(體用說)을 주장하였는데, 선생은 나정암의 설(說)을 따라 도심(道心)은 체(體), 인심(人心)은 용(用)이라 하여 ‘인심도심체용설(人心道心體用說)’을 주장하였다.
선생의 설(說)은 그 당시 사람이었던 이일재(李一齋)와 노옥계(盧玉溪:1518~1578, 諱 禛, 字 子膺, 諡號 文孝) 등의 비난(非難)과 공격(功擊)을 받았는데, 그 요지(要旨)는,
原文: 以用爲體 以動義靜]
(李一齋與盧寡悔書)
풀이: 用으로써 體가 되고, 動으로써 靜이 된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재(穌齋) 선생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과 ‘집중설(執中說)’을 지어 이에 응수(應手)하였다. 그 요지(要旨)를 보면,
原文:人心爲人欲則道心爲已發 可也 人心爲善惡則道心爲未發 可也-中略- 道心卽天理具於心者 而其發也以氣 故謂之人心 便有中節不中節故危 而其未發則無形 故微-中略-以人心兼善惡設觀之 而知道心必爲體 -齊答中- 道者事物當然之理皆性之德而具於心者由用而入體也 道者天理之當然中而已矣者 由體而達用也 對體則爲用 對用則爲體非若性只可言靜而不可言動者也 孔子曰 一陰一陽之謂道繼之者善也成之者性也於此亦可見其爲互爲體用也然道字因當行得名謂之用固當 道之體具於心則謂體不可以言道心者 恐未當也
(穌齋內集 懼塞錄 甲二, 人心道心辨)
풀이:人心을 人欲이라 하면 道心을 이발(已發:이미 쏘아놓은 화살처럼 중지하기 어려움)이라 해야 可하고, 人心을 善惡이라 하면 道心은 未發이라 해야 可하다. 道心은 곧 天理가 心에 갖추어진 것인 바, 그 發은 氣로써 하므로 이것을 人心이라 이르는데, 곧 中節과 不中節이 있다. 故로 危하다. 그러나 그 未發은 無形(理의 뜻이다)이다. 故로 微하다. 人心이 善惡을 겸(兼)하였다는 말로써 본다면 道心이 반드시 體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道라는 것은 事物의 當然한 理致이고, 모든 性(즉, 仁義禮智)의 德을 具備한 마음(心)이라는 것이니, 用에서 나와 禮로 들어가는 것이다.
道라는 것은 天理의 當然한 것으로 中일 따름이라서 體에서 나와 用에 達하는 것이다. 體에 對한 것은 곧 用이 되는 것이고, 用에 對한 것은 곧 體가 되는 것이다. 性을 다만 靜이라 말하는 것은 가능하고 動이라 말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는 것과는 같지 않다.
孔子가 말하기를, 하나의 음(一陰)과 하나의 양(一陽)을 道라 말한 것으로, 이를 이은(繼) 것은 善이고 이를 이룬(成)것은 性이다. 여기서 또한 그것이 서로 體와 用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道라는 것은 당연히 行함으로 因하여 이름(名)을 얻었으니 用이라 말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道인 體가 구비된 마음(心)을 곧, 體를 道心이라고 말하는 것이 不可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아마도 마땅하지 못하다.
라 하였는데, 다시 말하면 천리도심(天理道心)은 도(道)로써 사물(事物)이 당연(當然)한 이치(理致)이고 성(性)의 덕(德)이며, 오심(吾心:나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체(體)라는 것이다.이상과 같이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관한 학자들의 생각과 이론은 그들의 학문하는 방향과 방법에 따라 많은 차이점을 나타내고 있으나, 결국 그 최종목표는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일이 모두 그러하듯 틀에 박힌 한 두 가지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으며, 학문(學文) 또한 하나만의 설(說)로써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선생의 인심도 심변에 대한 일부의 비판이나 비난이 있다 하여 결코 선생의 이론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다만 유(儒)의 모든 경전(經典)과 불(佛)의 선학(禪學)까지를 연구한 대학자(大學者)였던 선생의 문집(文集)이 아직까지도 완역(完譯)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