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노 서(盧 恕)

노 단(盧 亶)

노준경(盧俊卿)

노상인(盧尙仁)

노상의(盧尙義)

노상례(盧尙禮)

노상지(盧尙智)

노상신(盧尙信)

노 의(盧 毅)

노자원(盧自元)

노자형(盧自亨)

노자정(盧自貞)

 

 

생 애

㉮ 가문과 젊은 시절

㉯ 유배생활

㉰ 환로와 만년기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품성▶

㉮ 효제충신

㉯ 학자로서

㉰ 교육자로서

㉱ 도덕군자상

 

㉲ 관료생활

     

학문과 철학▶

한국유학의

   전래와그 주류

선생의 문집

시강록

숙흥야매잠해

 

인심도심변

㉳ 집중설

㉴ 동몽수지해

㉵ 선생의 사상

 

 

㉶ 선생의 추원록

 

 

 

 

노 숭(盧 嵩)

생 애

선생의 품성

업 적

 

현대인물

 

▣ 노 수 신(盧守愼)

 

3. 學問과 哲學

 

자. 선생의 추원록

선생의 묘소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서 선생의 선영 서편에 모셨다가 선생 종가의 주손이 대가 자주 끊어지고 묘소의 터가 좋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아서 오래전에 면례(緬禮)를 하여 경북 상주 화서면 금산리 봉산에 있다. 한편 선생의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은 상주 화서면 사산리 옥연에 모셔져 있는데 앞에 소재 종택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진도(珍島)의 유생(儒生)들은 예(禮)를 갖추어 1603년(宣祖 30)에 봉암서원(鳳巖書院)을 창건(創建)하여 춘추향사(春秋享祀)를 지냈고, 상주(尙州)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봉산서원(鳳山書院)에 향사(享祀)했다.진도의 봉암서원은 인조(仁祖) 때 왕명(王命)으로 향촉(香燭), 제복(祭服), 제구(祭具), 제답(祭畓) 등을 하사 받아 제향(祭享)을 치렀다.

 

특히 고종 때 훼철(毁撤) 후에도 선생의 위패(位牌)는 일제강점기 때 향교의 사당(祠堂)에 모시고 향사를 했다고 전한다. 선생의 시호(諡號:나라에 공이 있는 유현들이 죽은 후에 임금이 주는 호)는 처음 문의(文懿)라고 내렸다가 숙종(肅宗) 20년에 대신(大臣)과 특히 대제학(大提學) 하계(霞溪:권유)의 진언(進言)을 듣고 문간(文簡:道德博聞曰文 正直無邪曰簡)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곧 예조정랑(禮曹正郎) 이만근(李萬根)을 보내어 치제문(致祭文)으로 선생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치제문의 주된 내용은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는데 태산과 같은 공적과, 임금을 섬기는데 숨김없이 극진히 하며,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제도의 실시와 지극한 선생의 효심(孝心)과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났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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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 종택(穌齋宗宅)

소재 종택(穌齋宗宅)은 경평공(敬平公:휘 嵩의 諡號) 숭(嵩)의 맏아들 상인(尙仁)이 화령에 살았던 판서(判書) 고원(高遠)의 딸을 아내로 맞으면서 이곳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 보면 아들 딸 구별 없이 분재(分財)를 같이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면 고판서의 영향을 입어 이곳에 살게 되었고 한편 경평공의 배(配) 낙성군부인(洛城郡夫人)이 상산(商山) 김(金)씨의 선조(先祖) 선치(先致)의 딸이니 곧 상주(尙州)가 외가이기도 했다.

 

공의 아들 청주목판관(淸州牧判官) 처화(處和)께서 이곳에 정착했고 그 아들 중추부사(中樞府事) 덕기(德基:세조의 끝의 同壻로서 요양 차 속리에 오셨던 세조를 맞아 출처대절(出處大節)의 이야기는 깊은 뜻이 있음)공의 대에 종택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 다음 대가 합천(陜川)군수였던 희선(熙善)과 금릉군수 희숙(熙淑)형제가 났는데 이 두 분의 자손이 북한까지 퍼져 산다. 다음 대가 돈령부(敦寧府) 참봉(叅奉) 경장(敬長)인데 일찍이 요절(夭折)하자 그 아들 찬성공 후(珝)가 외가 정란손(鄭蘭孫)댁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서울에 거주하며 이분이 종실(宗室:왕가의 종친)로 장가가서 20여군(二十餘郡)의 수령(首領)과 내직(內職)에서 선정을 하였고 서울의 건천(속칭 남산골)에 경제(京第:서울 집)를 마련하여 이때부터 서울과 상주를 내왕하면서 살게 되었다. 따라서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선생과 아우 후재(厚齋) 극신(克愼)공은 서울의 낙선방(건천)에서 출생했는데 건천은 정인지 등이 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서애 류성룡의 아버지)이 살았고 또 이순신의 부친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의 다음 아우 원용(原龍), 종용(終龍), 복용(伏龍), 항용(亢龍)은 사곡에서 출생했는데 보은, 공검 등지에 산다. 따라서 이곳의 종택은 경평공의 종손이며 문간공 소재선생의 종가이기도 하다. 소재선생이 만년(晩年)에 지금의 사산에 사곡루(沙谷樓)를 세우고 지은 시가 전해지니

 

궁도임의우존첩(窮途任意寓尊疊)

임의만년에 뜻대로 루를 지어 사니

병객부춘기안개(病客扶春幾眼開)

병객이 얼마나 회춘이 되려나

동탁지형편요요(東坼地形偏窈窈)

동으로 탁 트인 지형은 심원(深遠)하기만 한데

북래산세원최최(北來山勢遠崔崔)

북쪽에서 달려온 산세는 멀리 높고 높구나

풍생세경한요죽(風生細逕寒搖竹)

오솔길에 바람이니 대는 차갑게 움직이고

월전심창정방매(月轉深窓靜放梅)

심창에 달빛이 드니 매화는 조용히 피어나네

공벽근루고흥발(空碧近樓高興發)

푸른 하늘에 루(樓)가 닿아 흥이 높게 일고

중림일조호시최(中林一鳥好詩催)

숲속의 새도 시 읊기를 재촉하누나

 

라고 했다.

다음대가 영천군수를 역임한 대해(大海)인데 광해 때에 벼슬을 버리고 환향하여 난로당(難老堂)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여유롭게 만년을 보내며 많은 어려운 이를 구휼(救恤)한 공이 있었다. 아우가 삼형제이니 내사복 계래(戒來), 선무랑 계난(戒難), 통덕랑 계후(戒後)의 자손이 원천(遠川), 황산(黃山) 등지에 산다.

 

그 후대로서 예천군수 도형(道亨)과 주부 도명(道明), 판관 도흥(道興) 삼형제의 후손이 사곡을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예천공의 아들이 삼형제이니 성균생원 석명(碩命)은 사곡에 안변도호부사 준명(峻命), 봉화현감 경명(景命) 삼형제의 자손이 근처에 퍼져 산다.

 

그 후 이른바 문한이 끊이지 않았었고 대대로 혁혁(赫赫)하게 지냈는데 조선 말기의 화재로 인하여 종택이 전소(全燒)하게 되니 지금의 옥연(玉淵)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옥연사(玉淵祠)에는 강당(講堂)과 관리사(고자가(庫子家))가 있어 이를 종택으로 사용하다가 90년도에 다시 중건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는 말은 옛날 소재선생 대에 소유했던 부동산(산과 전지)은 별로 가감이 없이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 穌齋 盧守愼에 대한 연구

1.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에 대한 학문은 특성이 있기 때문에 1990년 5월에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에서 연구총서(硏究叢書) 제3집으로 [소재 노수신(穌齋 盧守愼) 연구]라는 제목 하에 김광순(金光淳:문학면), 문경현(文暻鉉:정치면), 최승호(崔丞灝:사상면) 교수의 공저(共著)로 책자를 발행하였다.

2. 1992년 12월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채용복이 [소재 노수신 시(詩)의 연구]를 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음(지도교수 李東歡). 이외에도 소재 노수신에 대한 연구는 여러 연구기관과 개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參考文獻: 1. 韓國儒學史 裵宗鎬 著 1985.3.10 延世大學校 出版部 發行, 2. 朝鮮儒學史 玄相允 著 1986.2.10 玄音社 發行, 3. 退溪選集 李滉 著 尹絲淳 譯註 玄岩社 發行, 4. 童蒙先習 李基奭 譯註 1982.9.20. 弘文化社 發行, 5. 論語 張基槿 著 1972.10.15. 明文堂 發行, 6. 孟子 車柱環 著 1972.10.15 明文堂 發行, 7.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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