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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의(盧 毅 一名 永孫)
자(字)는 군직(君直)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경평공(敬平公) 숭(嵩)의 현손(玄孫:5세손(손자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좋아하였으며 차차 나이 들면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정통(精通)하였고, 용맹(勇猛)과 학문이 높은 선비로 동료(同僚)간에도 선망(羨望)의 대상으로 공(公)의 장래를 크게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公)이 약관(弱冠)에 무과(武科)에올라 훈련원(訓練院)의 주부(主簿)와 판관(判官)을 거쳐 부정(副正)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항상 고향에 계신 어버이 봉양문제가 마음에 걸려 마침내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어버이를 지성으로 모시니 그 고을에서 보기 드문 효자라고 소문이 났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임금이 이 소문을 전해 듣고 공(公)을 치하하며 해서현감(海西縣監)으로 제수(除授)하였다가 바로 서도안찰사(西道按察使)에 제수하였다.공(公)은 언제나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정사(政事)와 특히 충효사상(忠孝思想)의 계몽과 도민(道民)의 교화(敎化)에 힘쓰므로 그릇된 풍속이 차츰 순화되었다.
공(公)은 이곳에서도 어버이를 늘 못 잊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전날의 연고(緣故)도 있고 하여 가끔은 서울을 왕래하였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역적의 무리가 역모(逆謀)를 도모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임금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숨을 쉬고 말하기를,
이토록 종묘사직(宗廟社稷:왕실과 임금이 죽은 뒤에 모시는 사당 또는 나라)이 위급한 처지에 이르렀는데 어떤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가 있어 이를 바로 잡아줄까 하고 탄식(嘆息)을 하였다.
공(公)은 본시 용맹하고 의리가 있는 무관(武官)으로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분연(憤然)히 칼을 뽑아 여러 동지들과 함께 역적의 무리들을 토벌하고 종사(宗社)를 보전(保全)케 하였다. 임금은 공(公)의 공로를 가상(嘉尙)하여 다시 서도(西道)의 안찰사로 재등용(再登用)하였고, 이에 가담한 공신(功臣)이 40여명이 되나 유독 공(公)에게만 추성보사우세정단공신(推誠保社佑世定難功臣)의 훈호(勳號)를 내리고 광원군(光原君)에 봉(封)하였다.
參考文獻:1.淸選考, 2.朝鮮王朝實錄, 3.韓國典故